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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노동현장서 노래하는 '운동권 테너' 임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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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노동현장서 노래하는 '운동권 테너' 임정현

입력
2013.11.2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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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음대생 시절 어땠나노래로 세상 못 바꾼다고 생각대학 때 성악공부 포기하고 노찾사·연극반·학생회 생활김민기 노래 내가 불렀는데 '빠다' 냄새나 조영남으로 대체● '운동권 테너'가 된 이유는한국에 수입된 클래식은 당대음악이 없는 기형적 성숙탈사회화로 거부감 많아 민중의 숨결 서려있는 우리말 노래 만들고 싶어● 노동문화 어떻게 보나세상을 바꾸자는 사람들이 집회문화 개선 못해서야노동절에 칸타타 공연 호평12월 2일부턴 단독콘서트 열어 노찾사·정진영 등 친구들 초대

미술분야에서는 일찍부터 제도권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민중예술이 생겨났지만 음악분야에서는 음악교육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민중예술을 주도했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 서울예고와 서울대음대라는 한국에서는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거쳤으면서 현장에서 움직이는 성악가 임정현(49)씨. 그는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첫 음반에 참여했고 89년 최초의 노래운동 단체인 '새벽'에서 민중가요를 불렀으며 거제 대우조선, 울산 현대중공업, 서울지하철 노조의 노래패를 가르쳤다. 91년부터 서울모데트합창단 기획실장과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는 '운동권 테너'였다. 97년 성악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며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아카데미아 이탈리아 로마 A.R.A.M아카데미에서 유학했지만 2004년 귀국해서는 테너로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다시 서울지하철노조 노래패 '소리물결'을 가르치고 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2011년 전태일(1948~1970)의 어머니 이소선(1929~2011)씨 영결식을 위해 노동자들이 만든 이소선어머니합창단의 상임지휘자를 여지껏 맡고 있기도 하다. 또 이 해에 한국사회의 현실을 담는 오페라를 만들고 서민들도 오페라를 쉽게 맛볼 수 있도록 찾아가는 오페라 공연을 하는 사회적기업 '포스오페라'를 만들어 대표로 있다.

그가 12월 2일부터 4일까지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단독 콘서트 '쫌'을 연다. 그의 오랜 친구들인 노찾사, 민중가수인 윤선애 조경옥씨, 영화배우 정진영씨 등이 초대손님으로 나온다. 스스로를 '테너, 오페라 가수 겸 제작자'라고 소개하는 그를 만났다.

-'운동권 테너'라고 불리던데요.

"그냥 테너예요. 운동권 테너가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음악회 제목이 포스터에는 [쫌:] 보도자료에는 '쫌', 보도자료 사진에는 '쫌!'이던데 어느 게 맞는 거에요?

"길게 말하는 [쫌:]이 제일 가깝네요."

-왜 쫌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제가 부산사람인데 예전부터 잘 쓰던 말이라 약간은 장난식으로 이름을 붙였어요. 후배들이 일도 안하고 생각이 엉뚱한 데 가있으면 제발 일 좀 해라, 이런 뜻에서 '쪼옴~'이라고 말을 많이 했어요. 여름부터 콘서트 기획회의를 하면서 제목으로 쫌은 어떠냐 그랬더니 주변에서 괜찮대요. 작년에 낸 첫 독집음반 '아름다운 생애 아름다운 미래'로 할까도 했는데 너무 고리타분하잖아요. 미친 수레바퀴처럼 달리는 이 시대에도 쫌이 맞는 것 같고. 쫌 그만 가자,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 이런 소리도 해보고 싶어요. 좌측이나 우측이나 자기들의 진영논리에 맞춰 과하게 나가는 것도 있고. 조직적으로는 뭉치는데 바깥을 너무 터부시하는 태도가 있더라고요. 좀 멈추자.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살자. 제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관객들은 또 자기나름대로 다양한 쫌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윤민석씨가 '쫌'이라는 노래를 작곡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콘서트에서는 어떤 노래를 주로 합니까?

"작년에 음반 냈던, 민중가요 작곡자들이 만든 창작곡을 주로 해요. '떠나기로 하다' '문상과 창밖' '회귀' '꽃잎' '그날이 오면' '후대에게'같은 노래들이요. 이건용 선생님이 작곡하신 '그렇지요'도 있어요. 그리고 미사곡과 외국민중가요도 몇 곡 불러요. 윤민석씨의 '쫌'은 안불러요. 하하"

-그런데 보통 생각하기로는 서울대 성악과 나왔으면 노래를 제일 잘 했을텐데 노찾사 1집에 참여했다면서도 독창곡이 없던데요.

"그때 당시로는 제 노래가 진보적인 지식인이 보기에도 빠다냄새가 너무 많이 났죠. 하하 제가 만약에 조영남씨처럼 노래를 불렀으면 됐을 거에요. (김)민기형 음반에서 솔로를 하나 했는데 방학 때 농촌활동을 갔다 오니까 조영남씨로 바뀌어있더라고요. 그 당시는 제가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클래식에서는 세상을 바꿀만한 게 없다고 느꼈으니까 포기한 점도 있었어요."

-노래로 꼭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제가 했던 게 노래니까요. 그런데 클래식이라는 게 세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점에서 좌절을 했고, 그래서 성악은 포기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노찾사도, 연극반도, 학생회도 했어요. 이번에 초대손님으로 나오는 정진영은 연극반때 친구예요."

-서울예고 성악부를 갔으면 어려서부터 노래를 하고 싶었고 잘한 거지요?

"초등학교 때 부산에서 YWCA어린이합창단도 했고. 예고까지 가게 된 것은 중3이 됐는데 집을 떠나고 싶더라고요. 3남 1녀 중에 막내로 치이니까. 그래서 고등학교 시험 석달 전에 서울예고 갈게요, 했더니 아버지가 원서까지 사다주시더라고요. 제가 사실은 '음악목사가 될까' 사기를 쳤더니 아버님이 적극 밀어주신 거지요.(웃음)"

-아버님이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유명한 분이셨다는데요.

"네. 임기윤 목사라고 인터넷에 쳐보면 나올 겁니다. 흔히 '의문사 1호'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나 민주화운동하는 사람들 지원하고 김대중씨도 후원하고. 그래서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서 보안사로 끌려가셨다가 돌아가셨어요. 당시 병원기록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는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공식 사인은 뇌출혈이 있어서 보안사에서 병원으로 후송된 후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옴) 그런 증세는 평소에 전혀 없었어요. 어머니가 연세대 간호대를 나오셨는데 아버지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을 때 보니 왼쪽 머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고 해요. 나중에 광주국립묘지로 이장할 때도 이장감독이 해골 뒤쪽이 깨져있는 걸 보고 '아이고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머리가 깨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가 고1이었지요.

"처음 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서울의 봄'이라고 민주화가 된다고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어요. 그런데 세상이 보이니까 '세상이 이런데 내가 노래를 하면 뭐하노' 그러면서도 노래를 놓지 못하는. 그런 시기를 보냈어요."

-그런데도 서울대 성악과를 간 것 보면 노래는 정말 대단하게 잘한 건데요. 예고 출신은 쉽게 붙습니까?

"아니요. 남자는 다섯 명 중에 저 하나 갔어요. 그런데 대학에 가니까 역시 클래식 음악 의 성격이 탈사회화되어 있잖아요. 순수예술만 이야기하지 사회성을 이야기하면 싫어했어요. 심지어는 당시에 민주교수들이 시국선언 발표하는 것을 음대교수가 사전에 고발한 경우도 있었어요. 베르디나 푸치니가 당대에는 대중예술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클래식인 거지. 이상한 거지요. 사회와 동떨어진 것도 병신이고 초기음악, 낭만에서 현대로 뛴 것도 병신같은 거예요. 중간이 없잖아요. 서양 같으면 후기 낭만이 있고 다양한 시도들이 있는데 낭만에서 별다른 시도 없이 현대음악으로 곧바로 와요. 당대음악 자체가 없는 기형적인 성숙이 되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알기 때문에 사람들도 클래식하면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요. 이렇기 때문에 반대로 제가 현장에서 클래식을 노래하면 좋아하기는 좋아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몰라 해요. 클래식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도 현장에 있어요."

-그런 탈사회화한 클래식이 싫어서 대학시절에는 공부를 전혀 안했다고요.

"네,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안이 완전히 꼬꾸라져서 어려우니까 장학금도 가끔 받고 시험 칠 성적은 유지했지만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연극반도 하고 노찾사도 하고 학생회도 하고.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당시 민문연(민중문화운동연합)의 '새벽'이나 부산의 '일터' 노래분과에서 활동을 했어요. 서울과 울산 거제에서 노조 노래패를 가르치는 일도 했고요."

-그런데 왜 97년에 갑자기 다시 클래식으로 돌아와 유학을 간 건가요?

"갑자기는 아니에요. 91년부터 계속 고민했어요. 제가 (노래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먹고 살려고 서울모데트합창단에 들어갔어요. 솔리스트의 목인데 합창에 맞추려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내가 노래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내가 제일 잘 할게 음악이고 내가 노동자들을 가르치는데 이렇게 계속하면 내가 내 자신을 배반하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하느라 공부도 안했잖아요. 그런데 계속 가르치면 계속 사기치는 거잖아요. 실력은 계속 떨어지는데. 내가 최대한으로 되어 와가지고 운동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갔죠. 많은 게 무너졌지만 현장노동자들은 그래도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그들이 세상을 이뤘을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을 내가 주지 못하면 그건 아니지요. 사실 늦었지요. 90년대 초에 나갔어야 하는 건데."

-나중에 대학에서 공부 좀 할 걸 후회한 적 없으세요?

"그때 했으면 순탄하게 살았겠죠. 그래도 후회하는 거는 없어요. 좀 불편한 건 있는데 누구는 안 불편해요? 있어도 불편하고 없어도 불편한 건데."

-외국에서 성악가로 활동하지 않고 돌아왔어요.

"너무 늦은 나이라 3류무대 아니면 서기도 어렵고 빨리 돌아오고 싶었어요. 나는 내 말로 내 노래 하고 싶은데 답답하잖아요. 8년 유학 동안 빨리 노래에서 자유로痴??내 노래 하고 싶다,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내가 가서 어떻게 해야지. 이런 꿈을 꾸면서 공부를 한 거에요. 오페라 공부도 정말 많이 했지만 내 노래를 하고 싶다, 고전의 명곡이 아니라 임정현 하면 생각나는 우리말 노래를 만들어내고 하고 싶다 그랬어요. 그런 식으로 작곡자들을 추동해내고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새벽'에서 활동하면서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노래들이 민중가요라고 하지만 성악가가 부르면 다 가곡이에요. '그날이 오면'도 그렇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광야에서'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가 다 그렇게 살아남은 노래들이에요. 이번에 콘서트에서 부르는 '문상과 창밖'도, '저 평등의 땅에' '회귀'도 다 한번 들어보세요."

-2004년 귀국하고는 다시 현장활동으로 돌아왔어요. 어땠습니까?

"제가 떠날 때는 세상이 굉장히 달라져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노동은 적이잖아요. 고등학생들한테 설문조사를 했더니 노동자는 지질하다, 되기 싫다 그러고. 우리가 (노동자를 비하적으로 부르는) '공돌이' '공순이' 그 용어 없애려고 그렇게 싸웠고 노동자가 자랑스런 이름이 되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노동자가 되면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가 노동자이면서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회까지 왔으니까. 이제는 바닥을 찍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클래식을 하는 예술가로서 바뀌지 않는 노동문화에 대한 답답함도 있을 것 같아요.

"클래식에 대한 거부감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게 놀랍지요. 노동자대회 가면 아직도 노가바 하고 매스게임 같은 이상한 춤 추고 노래도 수십년 된, 트로트식 노래를 해요. 80년대 90년대 그렇게 청춘을 바쳐가지고 열심히 일했던 동료들이 생각나고 그때는 도리어 나름대로는 수준이 있었는데 거꾸로 가는 느낌조차 들어요. 몇 십년째 똑같은 노래, 똑같은 집회, 미치는 거지요."

-사실 그렇게 싸워왔던 게 노동자들도 오페라나 클래식도 즐기고 다같이 수준있게 사는 세상을 꿈꿔서인데요.

"맞아요. 아니 그런데 실제로 노동자들은 다같이 오페라를 즐기고 있어요. 자녀교육을 위해서도 다 볼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대회다, 그러면 다시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비군복 딱 입혀놓으면 치마 두른 여자만 보면 다 휘파람 부는 그런 사고방식이 아직 있는 거 같아요. 하하하. 올해 노동절 전야제에 '칸타타 금강'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원래 뮤지컬로 만들어진 것을 포스오페라에서 칸타타로 만들어서 작년에 공연을 했어요. 좋아요. 동학 이야기고 민초들 이야기니까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전에는 민초의 역사가 노동의 역사거든요. 그래서 할만하다고 했어요. 민노총 한노총이 모여서 서울광장에서 저걸 하자, 서울시장 인천시장도 (민주운동 지지하는 사람으로) 있고. 요즘은 웬만한 시향이나 오케스트라에는 노조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노동절 때 할 수 있지 않냐. 그러면 노동자들 위해서 하는 거야 간단하지 않냐, 오케스트라 들어가고 합창단 100명 들어가고 얼마나 수준 있어요? 이제 노동집회도 이렇게 해볼만하잖아요. 역사적으로 이런 걸 처음 하면 그 홍보효과라도 엄청날 거다, 맨날 노동자들이 이상한 춤 추는 거 말고 폼나게 정말 놀 수 있는 거 하자. 그런데 설득하다 지쳤어요. 옛날 동사무소 보는 것 같아요. 개인으로는 클래식을 즐기고 즐길만하면서도 집단으로는 절대 삽십년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꿀 생각이 없는…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은 현장에서 노래를 많이 부르고 다녀요. 좋은 모습이잖아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아직도 다른 노동자들은 이질감을 가지고 보더라고요. 이, 이 눈꺼풀에 씐 이게 자기들을 망하게 만드는 것인데 정말 너무 오랫동안 생긴 모순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고상하고 우아하고 전문적인 것들이 노동이 될 수 있는데요.

"그럼요.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가지겠다는 놈들이 그런 걸 거부하면 트로트 가수하고 투쟁할 거에요? 예술을 가져가고 고전을 가져가고 자기들 거로 만들고 세상을 폼나게 변화시켜야지요. 그래도 다행인 게 얼마 전에 연세의료원 노조에서 저희 오페라단을 초청해서 연세대 대강당에서 '혜화동 라보엠'을 공연했어요. 노조가 요청해서 오페라 공연을 한 것은 세계 최초일 걸요."

-이소선어머니합창단은 잘 되어 갑니까?

"네, 매달 두 번씩 만나는 데 이제는 소리가 좀 잡혀요. 재적회원은 50명이 넘는데 들쭉날쭉하니까 합창단으로 소리가 안 만들어졌거든요. 이제는 12명 정도는 늘 나오니까 그 사람들 중심으로 노래를 해서 내년 5월쯤에는 정기공연을 한번 해보는 게 꿈입니다. 노동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니까 널리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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