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의 미사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할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종교의식인 미사를 매개로 한 점이 그렇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종교의 힘을 빌어 대통령 사퇴라는 정치적 요구를 희구하는 것은 큰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천주교가 어떤 종교보다 현실 참여 성향이 강하다지만 대선 불복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 대통령 사퇴 요구를 하면 오히려 역풍에 휘말릴 소지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천주교는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진 뒤 줄곧 이 사태에 비판적인 인식과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것은 비단 천주교 내 일부 세력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전국 15개 교구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을 비판했고,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도 "국가권력이 법률과 사회적 합의로 정한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 자체로 불법이며 시민 인권과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대한 천주교의 비판적 입장이 전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광범위한 지지에 터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주교의 이런 비판적 분위기는 역시 박 대통령의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박 대통령은 여전히 "대선 때 국정원 덕 본 것 없다"는 입장에서 요지부동이다. 검찰이 6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의혹'을 '사실'로 환치하는 증거와 정황들이 속속 드러났지만 박 대통령은 사법부와 국회로 사태 해결을 떠넘겼다. 그리곤 "덕 본 것 없다""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소신을 지켰다.
과연 그럴까. 검찰이 지난 대선(64만7,443건)과 19대 총선(56만2,785건)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 121만228건에 달한다고 발표한 이후에도 박 대통령의 그런 입장이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을까.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트위터 공간은 일반적으로 진보 성향의 20~30대가 많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보수 성향의 글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나는 그 시점을 2011년 10월 26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로 기억한다. 보궐선거 당시 나경원 전 의원은 트위터 공간을 중심으로 각종 의혹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결국 낙선하고 말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공소내용을 보면, 당시 국정원은 심리전단 조직을 확대한 상황이었고 2012년 2월에는 3개 사이버팀을 4개로 더 확충했다. 국정원으로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험이 뼈아팠을 것이다. 어떤 선거에서든 트위터 공간에 야당 후보를 깍아내리는 글이나 비방성 의견을 퍼뜨려야 적어도 여당 후보가 뜻하지 않게 낙선의 봉변을 당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는 경험도 얻었을 것이다.
검찰이 공개하지 않아 정확히 파악할 순 없지만 64만7,443건에 달하는 지난 대선 관련 트윗글 가운데 상당수는 야권과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을 것이다. 그 글들이 다시 얼마나 리트윗돼 퍼졌는지는 아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최소한 국정원은 진보 성향의 글과 의견이 주를 이루던 트위터 공간에 보수 성향의 글들을 대거 올려 놓음으로써 대선전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비판적인 글과 의견을 희석시키는데 성공했다. 진보 성향 사람들의 태도를 바꿔 지지 표를 더 늘리지는 못했다 해도 자칫 박 후보가 트위터 공간, 또는 트위터 공간을 매개로 한 현실 공간에서 나 전 의원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국정원이 막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덕'보고'도움'받은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덕이고 도움일까.
사제단의 사퇴 요구는, 비록 그 요구가 지나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반 국민의 합리적 반문에서 출발해 나온 것이다. 사제단의 미사에 불쾌감을 나타내고 격앙할 수도 있지만 그 근저의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박 대통령과 민심은 점점 유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상진 편집국 부국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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