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세상만사/11월 22일] 신뢰가 하늘에서 떨어질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세상만사/11월 22일] 신뢰가 하늘에서 떨어질까

입력
2013.11.21 12:04
0 0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잇따른 손짓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안 하느니만 못한' 정상회담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하다. 직접 전제조건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군대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문제에서 일본 정부의 전향적 태도변화가 사실상의 선결요건이 돼 있다.

그리 간단한 조건이 아니다. 우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의 실패에 미루어 반드시 그보다는 진전된 방식이어야 한다. 패전 이후 역대 일본 정부 가운데 가장 역사반성에 적극적이던 무라야마(村山) 내각이 1995년에 만든 '아시아여성기금'은 당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정치인이 짜낸 지혜와 정치현실이 절충된 결과였다. 93년의 '고노(河野) 담화'가 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 관여'를 인정했지만, 역대 어떤 정부도 직접적 강제 동원을 인정한 바 없다는 점에서 끝내 정부기구가 아닌 민간기구 형식을 띠어야 했다. 그것이 형식에 불과했음은 기금 조성을 일본 정부가 주도했고, 피해자에게 현금 200만엔과 함께 일본 총리의 사죄ㆍ반성 서한이 전달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민간기구라는 겉모양이 걸림돌이 되어 문제해결에 실패했다. 따라서 지금처럼 자민당 보수파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그때보다 진전된 해결 방식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는 신기루다. 설사 일부 내용의 진전이 있더라도, '성 노예 사냥'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이라는 국내의 요구를 충족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에 비하면 최근 두드러진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 퇴행을 바로잡는 것은 쉬운 문제일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재집권 이후 앞서 자민당 총재 선거나 총선 유세 당시의 퇴행적 과거사 발언을 수정,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런 아베 총리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거듭 표명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런 반성과 사죄의 말이 그대로 한국에 수용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일본의 역사인식 퇴행에 대한 한국민의 정서는 일본 총리 한 사람이나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 표명에 따라 형성된 게 아니다. 일본 각료나 자민당 간부의 언행은 물론이고, 일본 사회의 역사인식 퇴보나 반한ㆍ혐한(嫌韓) 정서 표출 등이 포괄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리 보면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은 불능조건에 가깝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만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일본에서 이뤄져야 하고, 적잖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시간 여유를 갖고 그런 변화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한일 양국의 정치관계 경색이 양국민의 상대국 인식을 악화시키고, 그것이 정치관계에 파급되는 악순환이 이미 시작됐다. 애초에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그에 대비한 한미 동맹, 중국의 군비강화 등 동북아의 안보 현실이 주된 판단의 잣대가 되었을 일본의 집단자위권 문제에 국내 여론이 일방적 거부감을 드러내는 게 단적인 예다. 여느 때 같으면 '화장실 낙서'로 여겨졌을 일본 주간지의 선정적 보도가 국내에 소개되고, 진위 논란까지 번진 것도 마찬가지다. 이에 못지 않게 일본의 대한(對韓) 여론도 악화일로다.

이런 현실은 원칙론에 충실한 듯한 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가 결과적으로 외교의 핵심 목표와 멀어지고 있음을 일깨운다. 대북 정책과 마찬가지로 신뢰는 저절로 쌓이는 게 아니라 접촉과 대화 등 행동을 통해 쌓인다. 그러고 보니 집권한 지 9개월이 다 되도록 박 대통령이 내정에서 어떤 결단과 실행을 했는지도 흐릿하다. 위험부담이 따르는 정치행위를 피하려는 소극적 마음가짐 때문이다. 안전운행을 위해 아예 차를 세워두는 것과 다름없다. 무리한 운행도 문제지만 차가 다 삭도록 세워두는 건 더 큰 문제다. 내정이나 외교나 박 대통령의 결단이 시급하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