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핸드폰은 거의 꺼져 있어서 그 번호로는 전화를 걸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읍내 5일 장에 나가거나 경운기를 몰고 농협에 가서 비료나 농약, 농사에 필요한 자재를 사올 때, 예식장이나 생일집, 초상집에 갈 때만 핸드폰을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의 핸드폰은 일주일에 한나절쯤 켜졌다 꺼지는 셈이다. 대개는 문갑 서랍에 들어가 있곤 하는 것이다.
핸드폰 좀 켜 놓으라고 말할 때마다 아버지는 왜 필요 없는 전기를 낭비 하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낸다. 핸드폰 해약해버린다고 엄포를 놓을 때만 잠깐 고집을 꺾는 척한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들일하러 다니는데 거추장스럽다는 게 아버지의 변명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핸드폰은 꼭 필요할 때를 위해 있는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갖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아버지의 핸드폰은 내가 갖다 드린 것이다. 아버지에 핸드폰을 갖다 드린 사연은 이러하다. 송년회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온 아침에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일요일 내내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간격을 두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모임에 나온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월요일 아침에 미련을 접고 새 핸드폰을 구입했다.
그런데 오후에 핸드폰을 보관하고 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새로 산 핸드폰을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낮에는 집에 아무도 붙어있지 않아 전화 통화가 불가능했다. 전화를 건 나만 답답해지곤 했다. 아버지와 자주 통화할 것을 감안해 두 개의 핸드폰을 커플로 묶었다. 커플 폰의 최대 이점은 자정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둘이 하는 통화료가 무료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버지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나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시간이다. 반대로 자정 넘은 시간은 아버지에게 그러하다. 내가 전화를 거는 시간에 아버지는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섯 시가 되기 삼십 분 전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는 유난히 목소리가 크다. "윤핵이냐? 나 아버지여. 별일 없는 거지?"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로 전화를 받는다. "예. 아버지…… 웬일이세요? 새벽부터……" "지난봄에 장에서, 네가 사 놓고 간 닭들이 너무 컸어. 언제 와서 잡아먹고 갈 거냐?" 아버지는 삼십 분도 안 남은 벽시계의 시간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떠드시고는, "니 엄마 옆에 있는데 바꿔주랴?" 한다.
어머니는 옆에서 목소리 좀 줄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잠이 다 달아나 정신이 맑아졌다. 새벽 공기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들판에 자욱이 가라앉은 안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름날 벼 포기에 쳐진 거미줄이 이슬을 안고 하얗게 드러났다.
몇 해 전 여름. 노릇노릇해진 담뱃잎을 따 밭둑에 쌓아둔 것을 경운기 짐칸에 싣고 돌아오는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피우는 담뱃불은, 아주 먼 나라에서 다가오는 불빛이었다. 담뱃잎이 찢어질까 밧줄도 못 묶은 경운기 짐칸에서 담뱃잎들이 춤을 추었다. 비포장도로는 밧줄을 촘촘히 묶어 만든 경운기 안장에 앉은 아버지를 헹가래 쳐주었다. 안마당에는 60촉 전구가 무수히 색실을 뽑고 있었다. 경운기 짐칸에서 내려진 담뱃잎들은 비슷한 크기로 골라져 줄에 줄줄이 엮인다. 줄에 엮인 담뱃잎은 건조장에 널린다. 담뱃잎을 널러 건조장에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 담배 냄새와 화기가 숨을 억누른다.
진이 다 빠진다는 말이 있다. 농사를 짓는 것만큼 진을 빼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쳐부수는 일이다. 하루 종일 쳐부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지금쯤 사랑방에 눅눅한 담뱃잎을 꺼내놓고, 아침밥 먹을 시간까지 둘이서 두런거리며 담배 목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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