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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절 교차하는 폐사지 걷는 즐거움…고달사지ㆍ흥법사지ㆍ법천사지ㆍ거돈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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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절 교차하는 폐사지 걷는 즐거움…고달사지ㆍ흥법사지ㆍ법천사지ㆍ거돈사지

입력
2013.11.1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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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절터, 화려한 단풍 무리는 떠나고 오래된 탑과 돌덩이들 사이에서 가을과 겨울이 교차한다. 부서져 흩어진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온전한 듯 보였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지난 순간을 게워 내 곱씹는 일은, 딴 겨를 없는 대처의 일상에서 벗어나 드물게 만나는 호사다. 그래서 사는 것이 퍽퍽하다 느껴질 때, 폐사지에 훌쩍 다녀오는 것도 제법 괜찮은 처방이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고 바람이 살짝 불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세속과 단절된 비밀의 공간

폐사지에서 입이 쩍 벌어질만한 풍경을 만날 일은 드물다. 비석과 탑의 흔적들, 표면만 빼곡하게 내민 주춧돌 등이 대부분이다. 눈은 작고 구체적인 것을 좇아야 하고, 대신 귀는 여느 여행지에서보다 크게 열어야 한다. 떠나기 전, 관련 정보라도 파악해 두면, 가서 보는 돌덩이 하나, 풀 한포기가 예사롭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여행의 지론이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이 폐사지를 찾아 나설 때다. 이러니 출발부터가 거창하고 부담스러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끔은 번거로운 사전절차 무시하고 빈손으로 걸음 옮겨도 좋지 않을까. 바람소리, 풀 쓸리는 소리 들으며 느릿하게 들판을 걷다보면 오히려 일상의 생채기가 시나브로 치유되니까 말이다.

경기도 여주 북내면 혜목산 기슭 고달사지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지난 밤 내린 비로 땅은 젖고 오랜만에 머금은 물기 견디지 못해서 나무들은 한줄기 바람에도 단풍을 떨어낸다. 가을은 이렇게 이 땅을 떠나고 있다.

눈앞에 거대한 탑비(원종대사탑비)와 석불대좌의 흔적이 덩그렇다. 탑비는 귀부(비석 받침돌)와 이수(비석의 지붕)가 장대하고, 조각이 화려하다. 불상 사라진 석불대좌는 균형과 비례, 조각 솜씨 등을 따져 봤을 때 수작이라고 안내판은 설명한다. 석불대좌 앞에 있던 쌍사자석등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유리로 된 지붕 아래 두 기의 석조가 누웠다. 이것들이 보이는 전부다.

“다들 마지막 단풍 보러 남쪽으로 갔겠지요,” 폐허는 안남희(70)씨가 지킨다. 발굴 전까지 절터 인근에 살다가 지금은 주변을 순찰하며 관리하고 있단다. 종종 답사여행자들이 단체로 다녀가지만, 평일인데다 비까지 내린 마당에 애써 여기까지 들르는 사람 몇이나 되겠느냐고 한다.

이렇듯 이맘때 폐사지는 참 적요하다. 사위가 어찌나 고요한지 속세와 단절 된 은밀한 공간이 따로 없다. 계절 따라 밀려왔다 밀려가는 흔한 관광객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비밀의 장소 말이다. 이 허허로운 폐허는 살면서 만나는 희로애락의 순간에 찾아와 온갖 감정과 넋두리를 쏟아 부어도 좋을 곳처럼 다가온다.

고달사는 내력이 깊다. 신라 때 지어져 고려 때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으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했다. 조선 초기까지 번창하다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가서 걸어보면 안다. 시간의 묵직함 차곡하게 내려앉은 들판이 얼마나 마음 평온하게 만드는지. 이 땅 한 가운데 서서 눈 감으면 천 년 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풍경은 헛헛하지만, 이 속에 발들인 기분은 그리 먹먹하지만은 않다.

절터에서 살짝 빗겨 산기슭을 오르면 자태 고운 두 기의 탑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들이 탑을 꼭 껴안듯 에둘렀다. 탑 찾아가는 길에는 낙엽이 벌써 소복하다.

▲천년 세월 흘렀어도 온기가 가득

강원도 원주 지정면 흥법사지와 부론면 법천사지, 거돈사지는 원주의 3대 폐사지로 꼽힌다. 여기에 고달사지와 충북 충주의 청룡사지를 엮어 이른바 남한강 폐사지 답사여행에 나서는 이들이 종종 있다.

흥법사지는 명성만 듣고 찾아간 이를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단출하다. 서너 채의 민가가 있는 밭 한 가운데 탑비(진공대사탑비)와 석탑이 느닷없이 서 있다. 흥법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라 말 크게 번성했다가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의 귀부와 이수의 조각 솜씨는 더없이 화려하고, 한 귀퉁이 부서져 위태로운 듯 서 있는 삼층석탑은 날렵하면서도 단아하다.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흥법사지에 비하면 절터의 규모가 상당하다. 법천사지는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라 어수선하지만 거돈사지는 정비가 제법 잘 돼 있어 초행길인 여행자가 네 곳의 폐사지 가운데 가장 좋아할 만한 곳이다. 법천사지에서는 탑비(지광국사현묘탑) 주변이 가장 예쁘다. 들머리 천 년 수령의 느티나무도 꼭 알현해야 한다. 거돈사지에서는 원공국사승묘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운치가 있다. 이곳에도 천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원숭이 얼굴을 한 탑비(원공국사승묘탑비)의 귀부가 재미있다.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산너머 산책길(역사문화순례길)로 연결돼 있다. 4.3km 완만한 경사에 약 2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흐르는 덕에 부론면은 교통의 요지였다.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 때 이 주변으로 절집이 많이 들어선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며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려는 왜군들에 의해 그 많던 절집들이 파괴된다. 원주 일대에 폐사지가 100곳이 넘는단다.

눈 뜨면 텅 빈 자리이지만, 눈 감으면 가득 찬 공간이 폐사지다. 이러니 오히려 눈 감아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웅장한 가람들과 아름답고 화려한 석탑과 비석, 진심을 담아 기도하던 보살들의 발자국, 휘영청 밝은 달빛과 두려울 정도의 적막, 모든 것이 어우러진 흥성거림….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비록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때의 흔적은 오롯이 남아 오감으로 전해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니, 폐허인데 결코 폐허가 아닌 곳. 언젠가 우리 사는 공간도 누군가 발자국 맞춰보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되지 않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면 외로움이 조금 덜어진다.

섬강에 겨울철새들이 벌써 한 무리, 그러나 폐허로 변한 절터에 온기는 여전히 가득하다.

▲여행메모

고달사지에서 88번 국지도를 따라가면 양평 지나 흥법사지가 있는 원주 지정면에 닿는다. 흥법사지에서 문막읍내를 거쳐 49번 국지도 따라가면 법천사지와 거돈사지가 있는 부론면에 닿는다. 네 곳의 폐사지를 다 둘러보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문막읍내에 문막막국수(033-735-9782) 등 막국수를 파는 음식점들이 많다. 간단히 점심식사 해결하기 딱 좋다. 원주 지정면에는 오크밸리 리조트(1588-7676)가 있다.

각 폐사지에는 가치 있는 문화재가 많다. 고달사지에는 고달사지승탑(보물 4호) 원종대사탑비(보물 6호) 원종대사탑(보물 7호) 석조대좌(보물 8호) 등이 있다. 흥법사지에는 진공대사탑비(보물 463) 삼층석탑(보물 464호) 등이 있다. 법천사지에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59호) 등이 있다. 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78호) 삼층석탑(보물 750호) 원공국사승묘탑(보물 190호) 등이 있다. 모두 조각 솜씨가 아주 화려하다.

여주ㆍ원주=글ㆍ사진 김성환기자

한국스포츠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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