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둘러싼 잡음이 적지 않다. 김 실장이 정부 요직 인선에 과도한 입김을 행사한다거나, 여당 의원들을 불러 식사정치를 통한 군기잡기에 나서는 등 정권의 2인자처럼 행세한다는 얘기들이 정치권에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14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기춘 대원군', '왕 실장'이란 말이 떠돈다고 꼬집었고, 김 실장은 "낮은 자세로 일하고 있지만 그런 표현이 나와 안타깝다. 더 낮게, 더 겸허하게 일하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은 '왕의 남자'는 늘 존재했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처사촌 박철언 전 의원이 '정권의 황태자'로, 김영삼 대통령 때는 아들 현철씨가 YS의 아호 거산(巨山)을 빗댄 '소산(小山)'이나 '소(小)통령'으로 불렸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박지원 의원이 '대(代)통령', 노무현 대통령 때는 문재인 의원이 '왕 수석', 이명박 대통령 때는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이 '영일(迎日) 대군'으로 각각 불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 자신만의 독특한 별칭이 붙여질 정도로 이들 2인자는 항상 여론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말로는 대부분 험난했다. 5개 정권의 2인자 중 문재인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권력형 비리에 휘말리거나 정치보복 성격이 짙은 수난을 당하며 철창 신세를 졌다. 정치권 내부의 시기와 질투도 일정 부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한꺼번에 쏠린 권력의 힘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한 탓이 크다. 대통령을 믿고 휘두른 권력의 칼이 결국에는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이다.
▲ 박지원 의원은 2003년 구속되면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는 조지훈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며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바 있다. 김 실장은 이들 2인자의 행로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밝혔듯이 더욱 낮은 자세로 임하는 길만이 자신도 살고 정권도 사는 길이다. 비서란 윗사람을 위해 입이 없는 그림자 역할에 충실할 때 박수를 받는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으로부터 부여 받은 책무는 거기까지다.
염영남 논설위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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