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의 여성 시인이 17년간 강아지와 살아온 이야기'라고 쓰면, 여기에는 단 한 글자의 왜곡도 없지만,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결코 제대로 소개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고통 받고 버림 받았던'이란 의미 한정의 수식을 강아지에 붙여보아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키워보기는커녕 한번 만져본 적도 없는 주제에 독서 중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대느라 두통까지 겪은 사정을 설명하려면, 불가피하게 이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저자의 모습부터 간단히 제시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조은(53) 시인은 서른 한 살에 부모로부터 독립해 사직동 셋집에 살기 시작했다.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 살고 있는 한옥에 둥지를 튼 게 14년 전이며, 강아지 또또는 그로부터 3년 전, 그러니까 두 번째 셋집에 살 때 그 주인집에서 기르던 개였다. 더없이 선량했던 주인집 가족들은 혼란스럽게도 개에게는 야만적일 만큼 폭력을 휘둘렀다. 소녀 시절, 이 시인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였던 개가 아버지 친구들의 먹거리가 돼 버린 후 혼절했던 경험이 있다. 그것은 세계관을 바꿔버린 경험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어디에도 묶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내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의식적인 삶이었다."(41쪽)
하지만 앙칼지고 똑똑하고 예민하고 도도했던 개 또또는 시인의 가족이 되고 말았다. 공포에 짓눌려 마취약도 듣지 않을 정도로 아팠던 또또에게서 아마도 그는 막연한 분노와 막연한 슬픔으로 거리를 헤매다니다 슬리퍼 차림으로 정신병원에 뛰어들어갔던 자신의 어느 젊은 날을 보았을 것이다. "나를 상담했던 그는 내 몰골만 보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정신과 상담을 받을 경제력이 없음을 한눈에 간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적선과도 같은 덕담을 해주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낼 수 있는 정신력이 내게 있으니 나를 믿고 살아가면 된다고 말했다."(55쪽)
저자는 "누구도 데리고 살려 하지 않아 내가 키웠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산문집은 존엄하게 살고자 한 한 인간이 버려진 잡견에게도 존엄한 삶을 부여하려 애쓴 17년간의 감동적인 기록이다. 본능을 이기지 못해 수컷 개를 따라 인왕산으로 뛰어오르던 또또를 쫓아 울먹이며 "안돼. 새끼를 낳으면 안돼"를 외치는 시인의 모습이나, 어머니의 임종을 하고 돌아와 잠든 시인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서 지켜보기만 하던 어둠 속의 또또나, 둘이 참 닮았다.
첫 만남에서 안락사의 마지막 날을 거쳐 또또의 유골이 묻힌 가시나무 밑에 새순이 돋기까지, 이 책은 삶으로 들끓는다. 단지 강아지의 삶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해 생명이 있는 그 모든 것, 산다는 것의 뭉클함이 이 책에는 있다. "또또와 나, 우리는 정말로 잘했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고스란히 저자에게 돌려주고 싶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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