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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11월 15일] 배추 네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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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11월 15일] 배추 네 포기

입력
2013.11.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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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래층 어르신으로부터 배추 네 포기를 선물 받았다. 주말농장에서 지금 막 뽑아 왔다며 식구들 먹이려고 약도 안치고 길렀다고 하셨다. 고맙게 받아는 두었는데, 베란다에 포대 째 놓아둔 배추가 오갈 때마다 눈에 밟혔다. 배춧국을 끓일까, 가까이 사는 친구들에게 한 포기씩 나눠줄까 며칠씩 눈여김만 하는 사이 싱싱하던 겉잎이 시들부들해졌다. 주말에 친정엄마에게 가져다 드릴까도 생각했지만, 배추가 그때까지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저러다 상해서 버리게라도 되면 어쩌나, 걱정이 커져갔다.

지난 봄, 갑작스레 심장질환으로 친정엄마가 입원하셔서 병원을 오갈 때였다. 병실을 지키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상을 차렸더니 남편이 밥을 먹다 말고 "장모님께 김치 좀 배워보는 게 어때요? 저리 몸도 자꾸 아프신데"라고 했다. 친정 엄마가 담아 준 김치를 매일 먹으면서도 늘 맛있다 하는 남편이니 그저 무심히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에 언젠가는 맞아야 할 엄마의 부재가 느껴지면서 마음이 서늘했다. 새삼, 엄마의 김치 맛을 새기려 천천히 씹어 넘기는데, 살짝 목이 멨던가.

어제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려는데, 마침 친정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장날을 다음 주 토요일로 잡았다면서, "바빠서 못 오지? 김치통들만 비워놔라. 아버지랑 싣고 가마"하셨다. 독립을 해서 혼자 지내던 미혼 시절에도, 결혼을 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요즘 같은 김장철이면 해마다 반복되는 대사다. "응, 굴 넣은 겉절이도 줘" 딸내미의 어리광 섞인 대답도 예나 지금이나 꼭 같다.

전화를 끊고 나서, 왜 갑자기 분연해졌는지 모르겠다. 올해는 힘이 들어서 처음으로 절인 배추를 샀노라는 엄마의 말이 귓전에 남아서였을까. 배추 네 포기로 김치를 집적 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배추를 꺼내 씻었다. 강아지 목욕 시키듯이 샤워기로 한 통 한 통 씻기고 나서,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배추가 생겨서 직접 하려는데 어떻게 담는 것이냐고. 바쁜데 왜 직접 하려느냐, 엄마 가져다 줘라, 아니다, 내가 한다 몇 번 실랑이 끝에, 간신히 전화로 불러주는 엄마의 김치 담는 법을 받아 적었다.

반으로 썬 배추를 다시 등분할 때는 칼집을 넣어 손으로 찢는다거나, 두툼한 밑동에는 소금을 한 꼬집, 꼬집듯이 집어 더 많이 뿌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절인 후에 씻으므로 배추를 미리 꼼꼼히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하루 종일 절여 둔 배추 생각만 하다가, 퇴근길에 장을 봐서 집에 들어왔다. 김치를 담아 본 적 없으니 김치 담는 데 필요한 용기들도 있을 리 만무라, 배추들이 여기저기 작은 그릇들에 담긴 채였다. 장볼 때처럼, 또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하나하나 준비를 해나갔다. 찹쌀풀을 '되직하게' 쑤고, 마늘을 빻고, 생강을 찧고, 갓과 미나리와 쪽파를 씻어 '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썰어 담고… 고춧가루에 배를 갈아 넣고, 액젓을 '사이다병 하나만큼' 넣고…'적당히' '알맞게'까지, 친정엄마 식 계량법이 영 익숙지 않았지만 어림짐작으로 헤쳐 나갔다.

어찌어찌 간신히, 김장한 김치처럼 모양을 갖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물건들은 김장을 한 백포기 쯤은 한 것처럼이나 어질러져 있고, 떨어진 김치 속을 실내화 발로 밟은 채 돌아다녔던지 사방에 빨간 김치발자국이 찍혀 있다. 와중에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친정엄마에게 보냈다. 그제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렸던지 "우리 딸, 장하다. 참 맛있어 보인다"는 문자가 왔다. "엄마 없이도 혼자 잘하네…"라는 문자도 이어졌다. 그 문장에 또 예전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엄마 딸 아니랄까봐, 김치 맛이 쫌 나네. ㅎㅎ. 그래도 엄마가 죽죽 찢어 입에 넣어주던 그 맛이 최고야" 문자 자판 찍는 게 익숙치 않을 텐데도, 다시 긴 답이 왔다. "주말에 오렴아. 옛날처럼 손으로 찢어 입에 넣어줄게"

김치통에 모양을 내 담아 놓은 김치 한 가닥을 죽 찢어 입에 넣어본다. 아삭하고 매콤한 게 제법 맛나다. 아무려나, 그래도, 네 포기 이상은 포기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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