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의 운명이 표류에 빠졌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은 21일 공개 경쟁 입찰 방식으로 매각된다. 그러나 매수자로 거론됐던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등이 입찰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면서 민간기업 또는 개인에게 건물이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건축계는 민간에 팔리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건축가 승효상 등이 소속된 김수근문화재단은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공간 사옥 보존 필요성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이 건물은 건축사무소 공간 그룹이 지난 1월 부도가 나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매물로 나왔다. 지난 몇 달 간 서울문화재단, 네이버, 현대중공업 등 여러 곳에서 인수 의사를 밝혔으나 모두 무산되고 21일 공매 절차를 밟게 됐다.
건축계가 우려하는 것은 건물 개증축 및 철거다. 그대로 보존해 건축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 재단 측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보호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는 근대문화유산 중 보존 가치가 크고 50년 이상 된 건물이 대상이다. 공간 사옥은 지어진 지 36년 밖에 안됐지만, 50년을 채우지 못한 건물 중에도 훼손이 임박한 경우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6일 서울시를 통해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한 재단은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지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새 건물주의 의사를 우선시하겠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관계자는 "등록문화재 지정은 건물주가 동의를 해야 하는데 누가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화재로 지정해버리면 산 사람만 피해를 본다"며 "매각 절차가 끝난 뒤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공간그룹의 입장도 애매하다. 현 대표인 이상림 건축가는 김수근문화재단 소속 이사이자 등록문화재 신청에도 동의한 바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가 되면 매각 금액이 떨어질 게 거의 확실해 마냥 반길 입장은 아니다. 모 관계자는 "재단과 공간그룹이 지속적으로 소통을 하고 있지만 모든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문화재단이 여전히 건물 매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서울시도 입찰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라며 "다만 지금은 관련 예산이 없고 관련 절차도 진행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서울시가 이번 입찰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건물 공시지가인 97억원까지 매각 금액이 떨어지면 매수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근이 설계한 구 사옥과 건축가 장세양이 증개축한 신 사옥, 현 이상림 대표가 지은 한옥 등 세 동으로 이뤄진 공간 사옥은 한국 건축사뿐 아니라 문화예술계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구 사옥 지하의 소극장 공간사랑은 1978년 사물놀이가 첫 선을 보인 곳이자 공옥진의 병신춤이 세간에 처음 알려진 자리다. 김수근문화재단은 18일 기자회견에서 트러스트를 설립해 시민 모금으로 공간 사옥을 매입하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정신 단국대 교수는 "누가 사들이더라도 근처에 창덕궁과 관상감관천대(보물 제1740호)가 있어 개축도 철거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공공기관이 매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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