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직장여성 A씨의 경우: "휴가를 내고 혼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아름다웠다. 수도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고, 누르는 대로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나는 없다. 가끔 셀카를 찍긴 했지만 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사색에 잠겨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을 근사하게 찍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서른을 앞둔 나는 아마도 그때 가장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빛나는 피사체가 되고 싶다는 욕망. 나에게도 파파라치가 필요해."
#30대 새신랑 B씨의 경우: "하와이로 신혼 여행을 다녀왔다. 코발트빛 바다에 천애의 절벽. 아내의 긴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화보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들여다보던 아내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자기, 나 과부야?' 과연 수백 장의 사진이 담긴 카메라 안에는 우리가 터질 듯 가슴 벅찬 신혼 부부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연예인만 찍나, 우리도 찍는다
'화보 촬영차 해외 ○○를 간다'는 문장의 주어는 대개 유명 여배우를 비롯한 연예인들이었다. 이 문장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글의 장르 또한 온라인 매체의 연예 기사였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 이 문장은 주어의 반경을 무한대로 확대하고 있다. 문장의 형식은 약간 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해외 여행 중 화보 촬영을 한다'로.
인터넷과 SNS의 급속한 확산으로 유발된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고 싶다'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새로운 업종과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유럽의 어느 거리, 어느 카페에서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포착된 유명 인사들의 스냅 사진을 보고 더 이상 부러워만 할 필요가 없어졌다.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및 피렌체, 미국 하와이 등 한인회가 발달한 해외 지역을 중심으로 화보 촬영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소업체들이 대거 생겨났기 때문이다. 요즘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데이트 스냅(연인들끼리 국내에서 자연스런 데이트 스냅 사진을 찍는 것)이 해외로까지 확대된 것. 올 여름부터는 한국에 본사를 두고 해외 거주 포토그래퍼를 고용하는 업체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올 여름 설립된 허니문스냅은 내년 상반기까지 체코의 프라하, 이탈리아, 호주, 하와이까지 지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가장 활발하게 해외 스냅 촬영이 이뤄지는 곳은 역시 파리. 영화와 소설, 드라마 등을 통해 낭만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한 데다가 랜드마크가 오밀조밀 몰려 있어 이동 경로가 짧기 때문이다. 업체마다 촬영 코스가 다르고, 가격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앞 같은 주요 장소들은 대부분의 코스에 포함돼 있다. 가격대는 3시간 기본 촬영 코스가 대략 45만~60만원선이며, 최대 6시간 촬영 코스는 100만원 정도 된다. 업체에 따라 협의 하에 한 시간만 촬영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가격은 25만원 안팎이다. 다소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해외 여행 자체가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투자에 과감한 편이라고 한다. 특히 촬영 서비스가 포함된 기존의 여행사 패키지 상품과 비교하면 가격대가 많이 낮아졌다. 몇 년 전부터 신혼 여행 커플 6, 7개 팀을 묶어 한국에서부터 사진작가를 동반하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기본 1박2일의 출장비(항공권과 숙박료) 외에도 150만~200만원의 비용을 따로 치러야 해 부담이 컸던 편이다.
신혼 부부부터 가족, 노부모, 솔로 화보까지 다양
고객들은 신혼 부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결혼식의 고전적 절차로 자리잡은 '청담동 스튜디오 촬영'이 식상해지면서 해외 스냅 촬영으로 대신하는 부부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아예 결혼 전 예비 신혼 여행을 와 결혼식에 동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할 사진들을 미리 찍어가는 커플들도 있다.
허니문스냅의 안상호(34) 공동대표는 "드레스 차림의 인위적인 스튜디오 사진 대신 자연스러운 해외 스냅 사진을 선호하는 부부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추세"라며 "해외 촬영 자체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 액티비티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촬영 중 "이만하면 됐다"는 신랑과 "조금만 더 해보자"는 신부 사이에 부부 싸움도 왕왕 발생한다.
신혼 부부만큼은 아니지만 가족 사진 촬영도 수요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어린 아이를 둔 젊은 부부나 효도 여행 온 노부부들도 사진을 많이 찍는다. 혼자 여행 온 젊은이들 중 솔로 스냅촬영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주로 여성들이다.
파파라치 없는 파파라치 컷을 위하여
고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이른바 '파파라치 컷'이다. 파파라치는 없지만 마치 파파라치가 찍은 듯 자연스럽고 세련된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달라는 요구가 많다. 파리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다가 지난해부터 해외 스냅 촬영을 시작한 피엔에스 파리스냅의 유지훈(37) 대표는 "정식으로 포즈를 잡은 사진보다는 에펠탑 걋?랜드마크를 배경으로 피사체의 시간이 정지한 듯 포착된 사진들을 선호한다"며 "피사체가 카메라를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찍어달라는 주문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인 만큼 포토그래퍼와 고객 사이의 호흡이 중요하다. 촬영 일정도 날씨를 고려해 최소 이틀 정도는 여행지에 체류해야 여유를 두고 촬영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는 날이 흐리고 비가 와도 나름의 정취를 자아낼 수 있지만, 하와이나 동남아 같은 휴양지는 날짜를 세심히 고려해 예약해야 한다.
원색의 의상과 선글래스 등 소품 필수
성공적 해외 화보 촬영을 위해서는 풍경에 어울리는 의상이 중요하다. 의상 그 자체가 풍경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니문스냅의 배영진(34) 공동대표는 "유럽은 포인트 역할을 할 수 있는 원색 계열의 의상이 사진 찍기에 좋다"며 "꽃이나 우산, 비눗방울, 풍선 같은 소품은 업체에서 준비해주기도 하지만 자기 스타일에 맞는 선글래스는 꼭 준비해야 사진이 산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정과 자세. 특히 남자들에게 중요한 대목이다. 배 대표는 "한국 남자들 특유의 굳은 사진으로는 어떤 배경과 의상, 소품을 동원해도 자연스런 스냅 사진을 얻기 어렵다"며 "여자분만 예쁘게 나와 사진을 버려야 할 때가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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