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컴퓨터를 잘못 건드려서 초기화돼 버린 것 같은 상황입니다. 예전에 작업해 둔 모든 게 날아간 것 같아요."
반세기 동안 군부독재의 서슬에 몸을 상한 이들을 변호해 온 한승헌(80ㆍ전 감사원장) 변호사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등에서 정권과 권력기관이 보이고 있는 퇴행적 행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과거 주요 시국사건 변호를 맡았던 일화를 담은 저서 (문학동네 발행) 출간에 맞춰 13일 만난 그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 변호사는 "(국정원 사건은) 민주공화체제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 사람들이 역사의 교훈을 잊은 채 과거 저지른 악행에 나쁜 지혜까지 덧붙여 업그레이드 한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독재가 국가나 개인에 미치는 불행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인데 민주화된 한국사회를 근본부터 뒤집으려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검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국정원 사건으로 인해 담당 검사가 징계를 받게 되고 검찰 지휘부 공백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1960년대 초 서울지검의 공안부장을 비롯한 검사들이 1차 인혁당 사건의 기소를 거부했을 때도 지금처럼 직무유기니 항명이니 하며 '찍어내기'를 하지는 않았다"며 "검찰이 전례 없는 시련을 겪으면서 중태에 빠졌다"고 개탄했다. 그는 검찰이 박 대통령의 지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공무원노조의 대선개입 관련 수사에 나선 것을 두고도 "집권자의 의향에 맞춰 수사권과 공소권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집권세력 앞에 약하고 국민들에게 강한 것은 민주 검찰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한 변호사는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등이 폭로한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사건, 황석영 작가 방북 사건, 민중미술 '진달래' 걸개그림 사건 등 에 담은 17건의 사건 가운데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 필화 사건 변호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소회했다.
8ㆍ15 광복과 한국전쟁 와중에서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패권주의에 상처받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분지'는 1965년 발표될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이후 북한 기관지 '조국통일'에 게재되면서 이적표현물로 간주됐다. 한 변호사는 "분지 사건은 군부독재정권이 문학작품을 문제 삼은 첫 사례이자 내가 처음으로 맡은 시국사건이었다"며 "그 후 누가 '이것 좀 맡아달라' 하면 어려운 공안사건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가책이 돼서 변호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1975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에 연루돼 두 차례 옥고를 치른 후 복권돼 인권변호사 활동을 지속했으며 98년 제17대 감사원장을 지냈다. 그는 "55년간 격동시대를 살아온 현장의 주인공들과 함께한 체험을 담은 이 책은 은퇴 작품 격"이라며 "작업중인 다른 책들이 마무리 되면 오랫동안 미뤄뒀던 아내와의 여행으로 남을 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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