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통신 마비로 구조대 접근 곤란…치안 불안 장기화 우려
태풍 하이옌의 내습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필리핀이 피해 수습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굶주림에 지친 이재민들이 정부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다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기간시설 마비로 구호 물자가 전달되지 않고 복구 인력의 현장 접근도 어려운 상황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태풍으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타클로반에서 13일 식량을 탈취하려는 무장세력과 약탈을 저지하려는 보안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현지 방송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나 군 관계자가 총격전 발생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는데다 무장세력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고 있어 정확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언론은 타클로반 부근에서 이날 탈옥수와 정부군의 교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교도소에 음식 공급이 중단되자 재소자들이 총기를 탈취해 탈옥한 뒤 먹을 것을 찾아 시민을 공격하면서 군인들과 교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탈옥수가 한 시민을 살해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전날에는 타클로반의 굶주린 이재민 수천 명이 허기를 참다못해 정부의 식량 6,450톤을 약탈했다. 에렉스 에스토페레스 국가식량청 대변인은 “타클로반에서 17㎞ 떨어진 알랑알랑 지역의 식량 창고로 사람들이 몰려와 비축미 등 곡식을 약탈해갔다”며 “이 과정에서 창고 건물 벽이 무너져 이재민 8명이 압사했다”고 밝혔다. 당시 군경과 민간 경호요원이 현장에 배치돼 있었지만 워낙 많은 이재민이 한꺼번에 몰린 바람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에스토페레스 대변인은 “도정된 쌀 외에 바로 먹기 어려운 곡식이 대거 약탈됐다”고 말했다. 타클로반시 관계자는 “전체 주민의 20% 정도에게만 구호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며 “먹을 것이 모자란 주민들이 약탈을 자기 보호 수단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세계에서 답지하는 구호 물자들은 현장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구호 활동을 하려 해도 도로와 통신망이 붕괴돼 다른 지역에서 발이 묶여 현장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MSF) 소속 의사 15명은 9일 세부에 도착했으나 12일까지도 타클로반으로 가는 이동수단을 구하지 못해 발만 굴렀다. MSF 관계자는 “타클로반 공항을 필리핀 군만 사용하고 있어 언제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수도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 발레리 아모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국장은 “할 일이 많지만 건물 잔해에 길이 막힌데다 운송수단도 없어 구호물자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 레첼 가르두스는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아서 하루에 약간의 쌀과 물 1리터를 제공받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또다른 주민 크리스토퍼 도라노는 “마실 물이 모자라 땅을 파 식수를 구한다”며 “그러나 이 식수가 안전한지를 따질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의약품도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타클로반의 한 병원에서는 이번 태풍으로 의약품을 제공받지 못해 결국 다섯달 된 아이를 잃은 한 엄마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현지의 구호 활동 관계자들은 “타클로반과 인근 지역에서 음식, 식수, 의약품 등의 공급이 계속 차질을 빚으면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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