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1월 12일 오후 3시 일본 도쿄 외무성.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은 별실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회담 시작 세시간 째, 침묵을 깨고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최종 액수를 말해 보시오." 한국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말을 받았다. "무상 3억 달러에 대외협력기금 3억 달러 그리고 민간경제협력(상업차관) 1억 달러에 플러스 알파가 우리 정부 요구요."
"이거 참 곤란한데... 그렇다면 독도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소."
김종필은 마음이 급했다. 10월 21일 열렸던 1차 회담도 돈 문제로 결렬된 터였다.
"독도는 미국이나 제3국의 중재에 맡기기로 하고 메모나 교환합시다."
합의에 따라 장관실의 메모지가 책상 위에 놓였다. 훗날 한일협정의 단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4시간 여의 마라톤 협상 끝에 이 날 작성된 것이다.
무상원조 3억 달러와 유상원조(해외협력기금) 2억 달러, 그리고 수출입은행 차관협력 등의 내용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강조했던 배상 청구권 문구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독도 문제 또한 모호한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이날의 합의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턱없이 낮은 전쟁 배상금과 주권을 망각한 대일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낙인 찍힌 김부장은 이후 공화당 대표직에서 사퇴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나야만 했다.
한일 수교회담은 1951년 일본 도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중재 아래 예비회담이 시작된 후 14년 후인 65년에야 서명이 이뤄졌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53년 종전 후 열린 3차 회담에서는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의 "일제 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는 망언으로 인해 장기간 회담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었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진전됐다. 미국으로부터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압력을 받던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미국과 일본에 보내 막후 협상을 벌였고 이듬해 메모 합의를 통해 배상금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한일수교와 경제부흥에 목을 맨 박정희 정권은 64년 굴욕적인 회담에 반대하는 대학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해 6ㆍ3사태를 촉발한 후 이듬해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협상의 종지부를 찍었다.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독도를 사이에 둔 한일 관계는 다시 냉기가 흐르고 메모회담의 두 주역은 잊혀진 지 오래다. 김종필 부장은 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자택에서 요양 중이고 오히라 외상은 80년 총리 재임 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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