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는 무섭도록 고요하고 적막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배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조금이었으므로 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다. 커다란 빗자루로 쓸어놓은 듯 별들이 하얗게 무리를 이뤄 포물선을 형성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 하얀 달 위에 우리 둘만이 외롭게 남아 있군. 달은 원래 이렇게 적막한 세계인가보이. 안 그런가?"
색채의 마술사. 대개 이 말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생을 보낸 어느 화가나,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어떤 건축가를 표현하는 상투로 쓰인다. 윤대녕이란 이름 앞에 그걸 붙여보고 싶었다. 한국어란 이미 선사시대에 농경에 순치돼버린 유목민의 말이어서, 그 언어로 분광(分光)해 내는 빛의 스펙트럼은 무척 시들하기 마련인데, 그의 한국어엔 아직 초원의 밤을 서서히 새벽으로 바꾸는 극히 짧은 파장의 빛이 일렁인다.
"저쪽 심연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다 한가운데 조그만 동력선 한 척이 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두 남자가 누워 애타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 한때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가면서 배가 기우뚱 흔들렸다. … 한데 왜 그런 불가해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공허했던 밤에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순수한 허기를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클라이맥스가 시각적 이미지와 겹쳐지는, 윤대녕의 인장과도 같은 특징이 '반달'에도 드러난다. 성장소설-그렇게 읽어도 괜찮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독법이다-의 꼴을 한 이 작품도, 그래서 의미의 단위로 파쇄(破碎)하기 전 한 덩이의 시각물로 먼저 음미하게 된다. 근작에, 윤대녕은 그런 특유의 붓질을 자제하려는 뜻이 뚜렷해 보이지만, 독자 혹은 팬들이 빛의 작가로 윤대녕을 읽는 태도를 버릴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마도 윤대녕은 완숙해지고 있는 중일 텐데, 그건 그의 몫의 고독이다.
"삶의 길을 잃고 헤매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덧없는 꿈이니 고독한 환상이니 화염 같은 고통이니 하는 말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잃었기에 어쩌면 사랑이 가능했고 가까스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알던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 소설은 간신히 유지되는 가족(어머니), 그리고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을 겪어내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관계엔 늘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해 정역학(靜力學)적 균형-이 또한 윤대녕의 인장이다-이 이뤄진다. 조금만 더 멀어지면 먼 우주의 심연 속으로 흘러가 버리고, 조금 더 가까워지면 지구의 대기 속으로 추락해 불타버릴 수밖에 없는 인공위성의 운명 같은 균형. 그래서 '반달' 속 주인공의 성장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서 저만의 궤도를 찾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여기에 동요 '반달'을 배경음악으로 깐 것은, 윤대녕의 늙지 않는 재기일 것이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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