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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11월 7일] 가을이 저무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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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11월 7일] 가을이 저무는 길목에서

입력
2013.11.0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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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립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이제 한창이었던 단풍도 쓸쓸한 빛으로 변해가겠지요. 아직 한 해의 겨울이 남았지만 고즈넉한 풍경이 한 해의 마무리를 재촉합니다. 참으로 바쁘게 시간이 흘렀지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당황하며 옷을 바꿔 입으면서도, 철 지난 옷을 입고 있다 문득 도대체 뭐가 얼마나 바쁜지 씁쓸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주말에는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한 해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내 년엔 뭐가 좀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입니다.

몇 년 전 다녀왔던 몽골 여행이 떠오릅니다. 생각해보니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었습니다. 가야지 가봐야지 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할 일을 멈추고 도망가듯이 훌쩍 다녀온 여행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의미없게 만들어버리고는 하지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바쁜 시간 속의 일상 때문에 어딘가로 떠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은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사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말로만 그렇다는 말이지요.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지난 시간에게 던졌던 핑계를 되돌아봅니다. 바쁘지 않으면 뒤쳐질 것 같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무너뜨린 여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조급한 마음이 우리의 발목을 한없이 붙잡고 있는 것이겠지요.

막 허물어지는 석양을 보며 되묻곤 했습니다. '넌 뭐가 그리, 언제나 바쁘니? 진짜 바쁘긴 하니?' 한밤중인데도 환한 밤을 맞이하고는 시간을 번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했습니다. 대자연 앞에서도 뭔가를 챙기는데 익숙한 도시인의 습성이라는 것,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지요.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과 땅이 가진 빛과 색깔의 변화에 황홀했습니다. 태양이 지고 있는 서쪽하늘에서부터 밤을 잡아오는 동쪽하늘까지 변화무쌍한 빛의 움직임이 아름다웠습니다.

초원 위에 사는 사람은 초원을 정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축을 가두려 울타리를 치지 않습니다. 양떼와 말들은 가끔 물을 마시려, 소금을 먹으러 잠깐 주인집에 들릅니다. 볼 일을 마친 가축은 다시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아 자유롭게 떠납니다. 여행을 안내하던 몽골친구에게 묻고는 했습니다. '누가 저 가축들을 훔쳐 가면 어떡해? ……누가, 훔쳐요?' 초원에는 초원만 존재한다는 것을 매번 잊었습니다. 초원 위에 서서 저는 서울의 그것을 고집하곤 했지요.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는 몽골친구를 보며, 머쓱해졌습니다. 여행 중 보았던 한 가족이 새삼 떠오릅니다. 한 게르에 들렀을 때, 마침 가족은 양을 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은 조그만 칼로 거죽을 벗기고, 고기를 자르고, 어머니와 어린 두 딸은 내장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안주인은 갑작스럽게 찾은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손님방에서 저희에게 낙타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대접했습니다. 제가 살짝 몽골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돈은 어떻게 벌어서 사는 거야? ……이분들, 돈 안 벌어요. 돈 벌 필요 없어요. 겨울에 양 고기 먹고, 여름엔 양젖으로 만든 야쿠르트, 마유주 먹어요. 가끔 양하고 감자나 곡식하고 바꾸어 먹어요. 이 사람들 돈 필요 없어요.'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뻔히 그 친구를 쳐다보았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이요.' 그가 건네는 마유주의 맛이 시큼했습니다.

모든 게 축축하게 젖은 세상을 보며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봄과 여름과 가을을 떠올립니다. 기억나는 것은 없고 바빴던 자신만 확연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것도 이제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진 가을의 끄트머리입니다. 언젠가 명절에도 일 핑계를 대고 고향집에 내려가지 못하자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보면 이제 죽기 전에 한 열 번 보겠구나.' 뭔가를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후입니다. 가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백가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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