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평면-백지 위에 이야기를 만들어 넣어서 입체-인물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가는 인물들에게 '내면'이라는 공간을 부여하는데, 그 내면-공간에 어떤 '감정'이 고여들게 하고 또 그것이 독자에게로 흘러나오게 한다. 그 감정의 구조를 정확하게 묘파하면서 삶의 진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서술자의 논변에 힘입는 소설도 있고, 어떤 감정들은 논리화될 수 없으며 '이야기 안에서만' 혹은 '이야기 전체로서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고 믿고 그저 이야기를 보여주기만 하는 소설도 있다.
소설집 한 권을 낸 신예 작가 손보미는 두 번째 유형에 속할 특유의 소설문법 하나를 어느새 구축해버렸다. 그녀는 헤밍웨이와 카버를 떠올리게 하는 기예로 현대사회학에서 '친밀성(intimacy)의 구조'라 부르는 관계들 내부의 불안정성을 자주 탐색하는데, 특히 '의심'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 쓸 때 손보미의 소설은 빼어난 결과에 도달한다. 지나치게 능숙해서 가끔 의심스럽다는 비평가의 불평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산책'은 '폭우'와 '여자들의 세상'을 잇는 또 하나의 수작이다.
한국일보문학상 예심위원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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