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 재무부는 의회에 제출하는 연례 환율정책 보고서에서 "원화 가치가 아직도 2~8% 저평가돼 있다"는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인용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무질서한 시장환경 같은 예외적 조건에서만 이뤄지도록 촉구할 것"이라며 전보다 강경한 어조로 원화 절상을 압박했다.
하지만 재무부가 인용한 IMF 보고서는 올해 상반기(6월 말)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이 5일 내놓은 '빨라진 원화강세 한국경제 위협한다'는 보고서에 따르면, 6월 말~10월 말 4개월간 원화 가치는 무려 8.3%(명목 기준) 절상됐다.
특히 주요 교역상대국(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등)의 통화들에 대한 교역량을 가중해 계산한 명목실효환율을 기준으로 하면 원화 강세 폭은 더욱 커진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추계한 6월 말~9월 말 명목실효환율로 보면 원화는 이 기간 5.4% 절상돼 총 61개국 중 절상률이 가장 높았다. 반면 명목환율이 4.2% 절상된 호주의 명목실효환율은 오히려 절하됐다. 명목환율로든 명목실효환율로든 이미 원화는 IMF가 지적했던 '저평가' 수준을 탈피한 셈이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통화 가치가 절상된 후에도 절상 추세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예상보다 높은 수준으로 계속되면서 달러화가 시장에 계속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올해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할 전망이다.
보고서는 "'원화절상+경상흑자'가 계속되는 한국의 상황이 1980년대 후반 일본과 유사하다"며 "일본과 같은 장기저성장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경상흑자로 통화가치가 오르면 수입이 늘고 수출이 줄며 경상수지가 악화한다. 이에 따라 통화가치는 다시 절하된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일본에선 이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일본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국제 유가가 장기 안정화하며 수입이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상흑자와 엔고현상이 지속되자 이를 이기지 못한 일본기업들은 결국 TV, 자동차 등 주력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자국 내 투자, 고용, 생산은 모두 위축됐고, 이는 장기 저성장의 원인이 됐다고 연구원은 분석했다.
이창선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원화 가치가 절상됐지만 원자재 가격 안정으로 수입이 크게 늘지 않고 있고, 대표적인 국내 기업들이 해외공장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원화절상 추세는 한국의 실물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과거보다 더 클 것으로 전망했다. 과거 '3저 호황' 시기와 2003~2007년의 '골디락스' 시기 등 원화가 급속히 절상됐던 시기는 세계적으로도 호황이 이어져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저성장으로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
이근태 수석연구위원은 "추산 결과 금융위기 이후 원화가 10% 절상되면 수출이 5%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특히 같은 조건에서도 섬유의복(8.5% 감소), 농축수산물(8.5% 감소) 등 개도국에 비해 뚜렷한 경쟁우위를 갖지 못한 산업에 충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원·달러 환율이 내년 초 1,000원대 초반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책 당국이 단기적으로는 미세조정 수준의 외환시장 개입을 하되, 장기적으로는 경상흑자 축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중장기적으로 내수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빠른 원화 상을 막는 방안"이라며 "경상흑자가 과도하게 누적되는 것을 피하고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국내 투자 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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