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개 층 66세대가 사는 서울 개포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트에 안내문 한 장이 붙었다.
"저희 가족을 소개합니다. '장미'는 10년 동안 시각장애인 안내견 역할을 하고 이제 편안한 노후를 위해 우리 집에 오게 됐습니다. 사람을 위해 평생 헌신한 우리 장미, 예쁘고 사랑스럽게 봐 주세요"
안내문을 붙인 주인공은 주민 정진경(47)씨. 아파트에서 기르기에 장미가 너무 크다는 관리인의 말에 직접 주민들을 설득하고 나선 거였다. 주민들은 응원 문구로 화답했다. "좋은 일 하셨네요. 환영합니다 " "빨리 보고 싶어요~"장미는 어엿한 '주민'이 됐다.
도심을 걷다 보면 대형견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개는 몸무게에 따라 대형견(23kg이상) 중형견(9~23kg) 소형견(9kg미만)으로 나뉜다. 국제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한국은 애완견의 81%가 소형견일 정도로 소형견 천국이다. 아파트 위주의 한국 도시주거환경, 특히 인구밀도 높은 수도권은 사람에게나 대형견에게나 그리 좋은 동거환경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형견을 기르는 사람은 13%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정씨 가족은 12년 전 퍼피 워킹(Puppy Walking)을 맡으면서 장미와 인연을 맺었다. 퍼피 워킹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생후 7주부터 1년간 일반 가정에 위탁돼 사회화하는 과정이다. 정씨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솜사탕 같던 장미가 은퇴해서 다시 우리 품에 안겼을 때 너무 뿌듯하고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견을 기르는 과정이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리가 쑥쑥 자라 있어 너무 신기했다. 6개월 만에 개 집을 3번이나 바꿨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 씨는 "당시엔 시작장애인 안내견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공원이나 음식점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이 장미 편이 돼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큰 딸은 이때의 경험을 에세이로 써서 미국 대학에 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외국 대형견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즈음이다. 미군이나 외교관 선교사들이 물꼬를 텄다. 윤신근애견종합병원 윤신근 원장은 "60년대에는 주로 대기업 총수들이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셰퍼드를 많이 길렀다. 70년대에는 투견이 유행하며 일본의 도사(Tosa)가 번졌고, 80년대에는 부의 상징처럼 그레이트 데인 같은 초대형견이 수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취향 따라 그레이트 피레니즈, 골든 리트리버, 복서 등 대형견종이 다양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황철용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우아하고 독립적인 아프간하운드에 '꽃혔다'고 말했다. 결혼 전 아프간하운드 타이(11)와 키시(9)를 입양해 꿈을 이룬 그는 요즘도 매일 출퇴근을 함께 한다. 황 교수는 "반려견을 고르는 일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아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갓 교수가 된 후 느꼈던 부담과 불안도 반려견들과 함께 교정을 뛰며 털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타이는 얼마 전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다. 그는 "수의까지 마련하며 마음이 무거웠는데 타이가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했다"며 "하루하루를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개를 싫어하던 이근주(전 잡지 편집장)씨는 30kg이 넘는 대형 진돗개 '탁이'를 기르며 막내딸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전날 술을 마셔도, 아무리 추운 날도 오전 6시에 일어나 산책해야 한다고 불평하다가도 외출했다 오면 펄쩍펄쩍 뛰며 반기는 탁이를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고. 이씨는 그 체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한 인터넷 매체에 '오마이펫'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들이 대형견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선 그 '덩치'에 있다. 박애경 한국애견협회 사무총장은 "큰 동물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는 건 일종의 본능"이라며 "크고 강한 대형견이 나를 따른다는 사실은 견주들에겐 큰 매력이자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만질 곳'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조성진 원광대 애완동식물학과 교수는 "반려동물은 현대인들이 가장 목말라 있는 스킨십을 무조건 수용해 준다"며 "교감에서는 물리적인 피부 접촉이 중요한데 대형견은 그런 면에서 탁월한 교감 상대"라고 말했다. 의 저자 김소희씨는 "대형견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도록 선별해 품종을 개량한 종이다. 사냥감의 위치를 알리는 비글, 사냥감을 회수하는 리트리버, 늑대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는 그레이트 피레네즈 등. 오랜 시간 인간 곁에서 일을 도와온 대형견에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건 일종의 본능"이라고 말했다.
정씨네 아파트처럼 대형견이 늘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2011년 3월 서울 도곡동의 한 주상복합아파트 주민은 이웃이 큰 개를 기르지 못하게 해달라며 '애완견 사육 및 복도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당시 법원은'(가처분 신청 대상인) 골든 리트리버는 안내견으로 활용될 정도로 유순한 종이고 대형견을 기르는 것이 이웃의 인격권 침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황철용 교수는 "오스트리아 빈에 출장 갔을 때 지하철 반려견 전용칸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반려견을 데리고 출근하는 모습을 봤다"며 "대형견은 인간이 자연을 생각하고 경험하는 가장 좋은 접점인데 우리나라의 폐쇄적 환경과 인식이 아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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