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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국가도 모든 초월성은 허구… 삶을 결정하는 건 대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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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국가도 모든 초월성은 허구… 삶을 결정하는 건 대중의 힘"

입력
2013.11.0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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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 번역본이 나온 서양철학 개론서의 고전 (정영목 옮김ㆍ봄날의책) 서문에서 월 듀란트는 네덜란드 철학자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1632~1677)의 주저 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읽는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한다. 유클리드에게 다가가듯이 다가가야 하며, 이 200쪽의 짧은 책에 금욕적인 한 사람이 과잉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깎아내고 자기 평생의 생각을 담아놓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이 책을 한번에 다 읽지는 말고, 여러 번 자리에 앉아 조금씩 읽어라.…주해서, 예를 들어 폴록의 나 마티노의 를 읽어라.…마지막으로 를 다시 읽어라. 그러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두 번째로 다 읽으면 철학을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시대순으로 서양철학의 흐름을 나열하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철학과 철학자들을 꼽아 소개한 듀란트의 책 목차에서 스피노자와 나란히 거론된 철학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가 전부입니다.

유복한 유대인 무역상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철학자로, 묵묵히 렌즈를 깎는 렌즈공으로 그리고 독신으로 살다 간 스피노자의 가 지금 한국에서 읽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전문가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 스피노자 관련 서적들의 출판이 활발하다. 올해만 하더라도 (오월의봄 발행) (자음과모음) (그린비) 이렇게 세 권의 해설서가 출간되었다. 더불어 스피노자의 삶에 대해서도 꽤 치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 전기 (텍스트)까지 번역돼 스피노자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다.

스피노자의 주저 가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 것은 1990년이었다. 강영계 선생의 번역으로 서광사에서 나온 를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이게 그 유명한 스피노자의 책이란 말이지!'하며 마음 설레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은 책을 사 들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시간까지만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도대체 아무리 애를 써 읽으려 해도 읽을 수 없었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에 속하거나 그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책 맨 처음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정의(definition)다. 자기원인이 본질이나 존재와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한단다.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기본적인 철학 훈련조차 받지 못한 내게 첫 번째 정의는 로 가는 길을 여는 안내자가 아니라 그 길을 처음부터 강고하게 차단하는 벽이었다. 그렇게 스피노자와의 철학적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번역서는 출간되었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를 읽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책이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신의 본질, 인간의 감정들, 인식의 종류, 윤리적 삶에 대한 제안과 같은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이 기하학책처럼 정의, 공리, 정리, 주석의 순서에 따라 서술되고 있으니 읽어가면서 나름의 철학적 서사를 구성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누구 말대로 참으로 "매력 없는 증명장치"로 얽히고설킨 책인 셈이다. 이렇게 난해한 책에는 반드시 관련 해설서나 연구서가 따라붙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원전 번역 이후 10여년 동안 그런 해설서는 등장하지 않았고, 스피노자는 한국 사회에서 거의 알려질 수 없는 철학자였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중반 이후 변화를 맞는다. 일찍이 196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철학자로 질 들뢰즈와 알렉상드르 마트롱이 있었다. 이들의 저서가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들뢰즈의 (2003)와 마트롱의 (2008)는 한국에서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주된 방향을 설정해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저서들이었다.

난해한 자체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 와 스피노자의 철학사적 위치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스피노자 철학의 실천적 급진성을 깨달았던 것도 모두 이들 덕분이었다.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만들어낸 프랑스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제 비로소 우리에게도 스피노자 철학의 여명이 밝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근래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들뢰즈와 마트롱의 스피노자 해석이 프랑스 68혁명이라는 사건과 그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분석을 참고해본다면, 그들의 작업의 핵심에는 아무래도 당시 잠재적으로 드러나던 대중들의 욕망, 그리고 실제 폭발적으로 표현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이 스피노자 철학과 상통한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보수이든 좌파든 상관없이 그 어떤 정당에 의해서도 대의되지 않겠다는, 그리하여 현대자본주의와 사회적 억압에 직접 반대하고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몸소 실현하겠다는 대중들의 욕망이 스피노자 철학이라는 필터를 거쳐 번역되어 나온 것이 아닐까?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과 새롭게 해석된 스피노자 철학의 급진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대의 새로운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스피노자 철학의 무엇이 그런 현상과 맞물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초월적인 모든 것을 비판하고 삶을 오로지 내재성의 평면에 위치 짓고자 했던 의 의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는 모든 초월성을 고발하고 비판한다. 인간에 비해 탁월하게 우월하다는 신의 신학적 형상도 거부하고, 기계적인 자연과 달리 자유로운 본성을 갖는다는 인간 의지의 초월적 자율성도 거부한다. 신이 필연성에 따라 생산하듯 자연도, 자연 속의 인간도 오직 필연성만을 따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신을 인간 초월적인 장소에 두려 하고, 자연 안의 인간을 '국가 안의 국가'처럼 자연의 지배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생각하려 한다. 자연에서 예외적인 인간의 형상은 만물에서 예외적인 신의 초월적 형상도 만들어낸다.

초월성의 철학이 극히 꺼리는 것은 인간의 자질에 비추어 신의 자질을 이해하려 하는 신인동형론이다. 그들은 신이 인간과 결코 비슷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지성을 훨씬 능가하는 신의 지성은 인간의 지성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인간 지성과 닮지 않은 게 신의 지성이라면 우리는 신의 지성이 우리 인간의 지성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신의 위대한 지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초월성의 철학은 신인동형론을 피해 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과 무한한 지성의 관계는 인간과 유한한 지성의 관계와 같다고. 대신 조건이 있는데, 이때 두 지성은 결코 동일한 의미로 이해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육지책이라고 할 이런 유비추론으로 신인동형론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 지성보다 더 탁월한 것이 신의 무한한 지성이라고 이해하지 않고는 위의 도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지성이 어떠한지를 오직 인간 지성에 비추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성의 철학은 교묘한 신인동형론에 그친다. 인간 지성보다 훨씬 탁월한 지성을 갖는 신, 인간의 정의로움보다 훨씬 우월한 신의 정의,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탁월한 신의 자유의지 등등. 심지어 신은 위대한 목소리, 위대한 손, 위대한 발까지 갖추게 된다. 이 얼마나 인간주의적인 규정이며, 이 얼마나 심각한 신성모독인가.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이런 농담은 어떤가? 말 할 수 있는 삼각형이 있다면, 그 삼각형은 삼각형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삼각형이야말로 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탁월하게 삼각형적인 것도 없고, 우월하게 선한 것도 없다. 삼각형 초월적인 삼각형도 없고, 인간 초월적인 선이나 정의도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만물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는 그런 전제군주가 아니다. 탁월하게 자유로운 의지를 갖는 군주가 아닌 까닭에 스피노자의 신은 생산한 만물 바깥에서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심판하는 신일 수도 없다. 신은 만물의 원인이지만 창조한 만물 바깥에서 관조하는 그런 원인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는 신은 자신의 능력을 오직 만물의 생산과 활동을 통해서만 표현한다.

다시 말해 신 없이 만물이 존재할 수 없듯이 만물 없이 신도 존재할 수 없다!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원인, 그것은 바로 만물이 존재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따라서 만물은 모두 제각각 신의 전능을 표현하는 완전한 존재자들이고, 이런 존재자들에 의한 삶, 그것이 바로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신은 만물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는 신이 되고, 그렇게 하여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삶은 신적인 초월성의 지배에 따른 불구적이고 타락한 삶이 아니라 오직 이 삶만을 긍정하고 이 삶 내에서 새로운 가능성만을 실험하는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

내재성의 평면에서 사라지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목적성이라는 허구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특정한 목적이 있다는 허구. 거미줄 치는 일이 거미의 의도라기보다는 본성의 필연성에 따른 행위이듯이 만물을 생산하는 신의 활동도 특정한 목적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적인 본성의 필연성에 따른 것일 뿐이다. 생산할 이유나 필요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어떤 결핍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에게 결핍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은 충만하다. 따라서 뭔가를 생산할 이유나 필요를 갖지 않는다. 본성 자체가 곧 만물이기 때문에 만물의 원인인 것이다. 이 세계와 삶이 존재해야 하고 향해 가야 하는 특정한 목적은 없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삶, 즉 내재성의 평면으로서의 삶은 초월적인 목적 아래 삶을 부정하고 비방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삶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야말로 최고의 함의라고 할 수 있다.

초월성에 대한 부정과 내재성에 대한 긍정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면 그것은 초월적 통치권에 대한 부정과 직접적이고도 절대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 된다. 자신만을 보존하기 위해 사는 인간들의 욕망(코나투스)으로 인해 인간들 사이의 만남은 서로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슬픔의 감정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에게 공동체와 국가는 바로 이 슬픔을 회피하고 기쁨을 증가시키기 위한 이성적인 장치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자들은 대중들의 권력을 통치자에게 완전히 양도한다는 전제 아래 국가를 디자인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는 자연권의 초월적 양도란 있을 수 없다. 코나투스의 포기 대신 좋고 나쁨을 순전히 개인적으로 판단할 권리의 포기, 그리고 집합적 변용을 따르겠다는 공통의 약속, 그러면서도 개인을 보전하기 위한 만인의 최선의 노력, 이것이 스피노자의 새로운 사회계약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체가 대중들의 자연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면서 자연상태보다 더한 공포를 초래할 때 양도한 자연권을 대중들이 직접 회수해서 행사하는, 구성적 혁명의 장치가 반드시 내재하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자주 소개되었던 이유도 아마 이런 개념들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근대는 곧 자본주의 사회이고, 나아가 신자유주의도 정당한 근대라는 독단적이고 초월적인 사유에 대항할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것. 스피노자의 윤리정치론은 정치공간에서 구성원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초월적 지배집단이 아니라 대중의 능동적 힘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국민소득 증가나 선진국 진입과 같은 모든 초월적 목적들이야말로 대중들을 기만하고 대중들의 삶을 파괴하는 허구라는 사실도 얘기해준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은 그런 허구들이야말로 눈에 태양이 동전만 하게 보인다고 해서 태양의 크기가 동전 정도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비천한 제1종 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우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슬픔을 낳는 모든 사회적 불화들은 이성에 도달하기 위한 공통의 노력에서 도피해 1종인식이라는 맹목적 신앙과 초월적 신념체계에 갇힌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실천과 실험이야말로 천변만화의 신적인 능력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수영 인문팩토리길 연구원ㆍ서울대 국문과 박사

저서 등

■ 스피노자 관련 서적

(스티븐 내들러 지음ㆍ김호경 옮김, 텍스트 발행)

스피노자의 삶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스피노자에 관한 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 책만은 스피노자의 삶을 아주 꼼꼼히 정리한 훌륭한 전기에 속한다. 스피노자 삶의 전체적 맥락을 놓칠 정도로 자세한 서술이 일품이다.

(질 들뢰즈 지음ㆍ박기순 옮김, 민음사 발행)

스피노자 연구에 있어 가장 독보적인 철학자를 들라고 하면 모두 들뢰즈를 꼽을 것이다. 이 책은 들뢰즈의 능력을 증명하는 책으로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중심 주제인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 그리고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 주요 개념을 설명한 작은 사전도 품고 있다. 게다가 스피노자 삶에 대한 철학적 전기도 있고, 스피노자의 현재성도 설명하고 있어 이 한 권의 책으로도 충분하다.

(이수영 지음, 오월의봄 발행)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번역서가 나오고 있지만 그런 책을 직접 읽기란 힘들다. 그렇다고 스피노자를 해설해주는 책도 많지는 않은 형편이다. 이 책은 를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적 맥락과 개념들의 의미, 윤리적 함의 등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해설한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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