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국정감사를 접했던 날은 마침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강의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자신의 소신을 에누리 없는 직설로 밝히는 검사의 목소리, 그 단단한 어조에 한참 마음이 머물렀다. 이 장면은 1948년, 소련 작곡가 중앙회의에 강제로 소환됐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과도 절묘히 겹쳤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좌중의 거센 비판을 감내하며 연단 앞에 고독히 서있던 소비에트 작곡가와 대한민국의 검사는 시대를 넘나들며 그렇게 같고도 달랐다.
소비에트의 대표적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리저리 기우뚱거린다. 독일의 신문 '디 벨트'가 "음악사에 결정적 기여를 남긴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 치켜세울 때, '타임즈'는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권력에 헌신했던 신봉자"라 비꼬는가 하면, 누군가는 선전용 음악에 능했던 체제순응적 작곡가라 파악했고, 다른 한편에선 반독재의 메시지를 악보에 숨긴 저항의 작곡가라 주장하기도 한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897일 동안이나 포위되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전장의 한 복판에서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 자욱한 포연, 단전과 단수, 기근과 혹한이 도시를 죽음의 공포로 잠식했지만, 그는 웅크린 사람들의 무릎을 다시 음악으로 일으켜 세웠다. 스탈린은 이 교향곡에 크게 만족하며 애국적 저항과 적군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 걸작이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작곡가의 속내는 영 달랐다.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파시즘에도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7번 교향곡의 표제 레닌그라드는 나치에 점령되기 전 스탈린에 의해 이미 철저히 파괴된 도시를 의미할지 모른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낙관적 묘사로도 극악한 상황을 암시했다. 흰색으로 검정색을 그릴 수 있던 이 신묘한 처세를 '유로지비'라 일컫는다. 바보처럼 행동하되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으며, 이중 삼중의 함축 뒤에 숨어 있으나 실상은 신랄한 폭로를 일으키는 고도의 기법을 통해 작곡가는 당의 강압적 통제와 스스로의 창작의지를 위태로이 중재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극 '라요크'엔 특이하게도 스탈린 가면을 뒤집어쓴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스탈린이 실제로 즐겨 불렀다는 민요 '슐리코'의 선율이 그대로 묻어난다. 가사는 더욱 노골적이다. 당시 공산당이 쇼스타코비치에게 강요한 지침을 충성스레 읊고 있는 것. '동지여, 우리는 형식주의 음악과 같은 의심스러운 실험을 금지해야 한다. 오페라는 발랄해야 하고, 대중적이어야 하며 오직 사실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담론이다!' 독재자의 애창곡에 선동적인 구호까지 입혔건만, 쇼스타코비치의 동료들은 이 곡을 듣자마자 "즉시 악보를 찢어버리라"며 기겁한다. 친구의 안전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스탈린과 당에 찬동하는 모양새일지라도 겹겹히 비튼 풍자를 간파 당한다면 작곡가의 목숨은 곧 위험에 빠질 것이었다. 때는 1948년,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활개를 치며 3,000만명이 숙청 당했던 암흑의 시기였다.
그의 이중적 페르소나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향곡 9번의 뒤틀린 풍자를 간파한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형식주의자란 죄목으로 기소하며 인민의 반역자로 몰아 부친다. 그는 중앙회의에 불려나와 혹독한 자아비판을 강요받는다. "모든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내 음악은 잘못 되었다." 그리고 여기, 다음의 장면이 이어진다. "나는 작곡가이다. 어떤 상황에도 작곡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국정감사에 불려나온 대한민국 검사의 토로와도 절묘히 겹치는 대목이다. "나는 검사다. 어떤 상황에도 수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돌팔이 같은 당의 통제로 혀가 묶여버린 예술"이라 한탄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스스로를 "끈에 매달린 종이인형"이라 낙담했었다. 강골 검사가 물러난 특별수사팀엔 새로운 검사가 임명되었다. 그가 부디 쇼스타코비치의 자조를 닮지 않기를 바란다. 게다가 '유로지비'는 예술가에게나 어울리는 처세일지 모른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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