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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다큐 사진작가 한금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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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다큐 사진작가 한금선씨

입력
2013.11.0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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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참사로 시작한 달력 작업5년간 사진작가 30여명 참여수익금은 노숙자·시위자 등 지원올해는 현대차 비정규직 도와● 장기농성장 17곳 찾아다녀밀양 어르신들 온돌움막서 버텨"사흘이면 끝날 줄 알고 시작"농성자들 말 듣고 가슴 콱 막혀● 파리 사진학교 수석졸업잡지 '노동운동' 보고 사진 시작'진짜 나'와 독대하고 싶어 유학앞으론 시골 마을서 작업할 것

다큐멘터리 사진가 한금선(46)씨를 알게 되면 놀라는 게 몇 가지 있다. 털털한 선머슴 같은 인상과 달리 프랑스의 사진학교를 수석졸업한 유학파이고 요리를 매우 잘한다. 학습으로 가능한 서양요리 뿐 아니라 김치와 전골 찜 나물무침처럼 솜씨가 손에 착 달라붙어야 할 수 있는 한식을 기막히게 만들어낸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 음식을 도맡아 한 것이 손에 익은 것. 그는 실제로도 사람들을 먹이기 좋아하지만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을 모아 달력을 만들고 사진집을 만들고 그 수익을 기부해 사회적 약자들은 도움받고 사진가들은 사진을 발표하는, 일종의 잔칫상을 차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을 모아 달력을 만드느라 바쁘게 지냈다. '빛에 빚지다'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이 사진달력은 올해도 2,000부가 팔려 수익금은 곧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지회에 전달될 예정이다. 용산참사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의 달력 작업은 올해로 다섯번째에 이른다.

그가 평생 천착하는 주제들은 집시에서 노숙자, 요양원의 할머니들, 농성현장의 고달픈 시위자들까지 이 세상에 하소연하고 싶은 이들이다. 이런 사진은 실상 잘 팔리지도 않는다. 돈 안되는 일에 계속 쫓아다니면서도 그들을 세상과 소통하게 하지 못하고 사진만 쌓아두는 것이 부채감으로 남는다는 이 작가는 사진작가라는 말도 꺼린다. 사진가나 사진작업자로 불러달라고 했다. 노동의 냄새가 물씬한. 그를 만났다.

어쩌다 달력작업을 하게 됐어요?

"2009년쯤에 용산(철거)현장에 예술가들이 많이 모였어요. 하루는 문화인들이 실천의 날이라고 해서 카페를 빌려 여러 가지 작업들을 했는데 사진가들은 사진관을 했어요. 용산의 식구들(피해자 가족)도 찍어주고 거기 오신 분들도 찍어주고. 어떤 사람은 사과하라는 의미의 사과를 들고 찍기도 하고 리본도 만들어서 찍기도 하고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 다음부터 조재무 사진가가 종종 사진관을 했어요. 그래서 거기가 사진가들이 방문하는 아지트가 됐지요. 노순택 사진가랑 밥을 먹다가 용산식구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게 뭐겠는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당시 희생자분들의 장례를 치러주지 못해서 냉동고 비용만 해도 수억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돈을 보태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우리들을 보니까 팔릴만한 사진가들이 없는 거에요."

우리들이라는 게 누구예요?

"사회와 인간의 이야기를 찍는 사진가들. 그래서 사진가들이 달력을 만들면 좀 사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예산을 잡아봤더니 (실패해도) 50만원에서 100만원을 날리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에 아는 디자이너 사진기획자도 같이 하고 현장에 와보지 않는 사진가들도 합류를 시키자 그래서 지방에 있는 선배 사진가들한테 연락을 드렸더니 다들 좋다, 작품 기증하겠다 해요. 그래서 15명이 참여했어요. 사진가들도 다 10만원씩 냈어요. 망할까봐."

돈도 내고 작품도 내고…

"처음에는 우리 돈으로 우리가 만드는 거라고 시작을 한 거니까요. 사진가들이 10부씩을 선구매한 거지요. 그래서 1,500부를 만들어 인터넷으로 팔기 시작했어요. 첫 해에는 안팔릴까봐 인터넷 주소를 요만(손가락 두마디)하게 인쇄해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줬어요. 그랬더니 달력이 나오기 전에 완판이 됐어요. 올해도 완판이 됐고요. 작년에는 3,000부를 찍었는데 올해 줄었지요. 아무래도 정권말기에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있잖아요. 올해는 약간은 언 땅 같은 느낌. 물론 안에서는 봄을 준비하고 있지만. 올해도 인쇄하는 날 500부를 더 찍어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제가 잘랐어요. 사람 모으고 사진 고르고 선주문 받고 인쇄하고 전시회 하고 거의 석 달 정도 걸리는데 더 길어지면 사진가들이 빨리 자기 작업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든요. 연대하는 곳에 돈을 더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진가들이 빨리 자기자리로 돌아가야 내년에 또 이 작업을 부담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거든요."

5년 동안 참여한 작가는 얼마나 되요?

"35명? 40명? 30명은 넘는 거 같아요. 젊은 사진가들에게 기회를 많이 줘요. 올해 이발관사진을 내놓은 친구는 대학교 4학년이에요. 이발관만 찍으러 다니는 친구인데 앞으로 작업이 뭐가 될까 기대되지요."

어딘가를 도우면서 사진가들에게 발표의 기회도 준다, 이거군요.

"사진작업을 한다는 거는 소통을 하고 싶다는 건데 현장 사진을 찍으면 소통이 힘들어요. 평면인 사진은 속도나 입체감에서 멀티미디어에 밀렸어요. 집에 작품만 쌓여가는 거지요. 그러면 피사체에 대한 부채감이 생겨요. 누군가는 시간과 생활을 내보여 줬는데 사진은 컴퓨터 앞에서만 잠자고 있으니까. 용산을 찍었는데 어디에도 발표를 못하니까. 그래서 '빛에 빚지다'라고. 하하"

작가들은 작품비는 받아요?

"아뇨. 다 기증이지요. 작년부터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자비 내던 것을 5만원씩 받아요."

팔리지도 않는 작가들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매번 느끼지만 아, 세상을 기록한 것에 대해 다들 뭔가 역할을 하고 싶었구나. 기꺼이들 기쁜 마음으로 하세요."

지난 겨울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때 사진가들과 농성현장 찾아 다니는 것도 기획했지요.

"2월에 후배들 세 명이랑 장기농성장 열일곱 군데 정도 돌아보고 왔어요. 침낭도 챙기고 준비 단단히 하고 갔는데 장기농성장들의 노하우가 놀라운 거에요. 밀양에는 대선 결과를 보고 정말 장기화되겠구나 싶어서 온돌 움막을 한 채 더 짓고 계셨고요. 온돌움막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아침 9시에 불을 지피셨대요. 그런데 저녁까지 뜨끈뜨끈. 어르신들이 진짜 능력자예요. 어느 농성장에 가면 압력밥솥으로 보일러를 만들어 놓았어요. 장기농성한다고 스물네시간 머리띠 두루고 구호만 외칠 수는 없잖아요. 제일 가슴이 콱 막히는 건 모두가 사흘 정도에 끝날 줄 알고 농성들을 시작했대요. '우리에겐 너무도 지독히 정당한 것이어서 2, 3일만 하면 끝날 줄 알았다, 이렇게 길게 될 줄 알았으면 아무도 시작을 안 했을 거다.' 여름에 시원하라고 쳐놓은 파란 천막이 겨울에 얼어서 버적버적대고 한겨울에 쳐놓은 두터운 천이 한 여름에 바래버리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거리에서 전시라도 하지요.

"가로에 설치하면 바로 철거당해요. 재작년 한진중공업 때 광화문 바닥에 붙였더니 곧바로 경찰이 오더라고요. 그 대신 우리의 방식이 있어요. 재작년에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2차에 가보니까 사진가들이 줄잡아 15명은 넘게 있더라고요.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 오다가 (사진 전문) 아카이브 출판사의 편집장을 마주쳤어요. 제가 친구들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드리면서 거칠지만 팔딱팔딱 숨쉬는 사진집 한번 만듭시다, 제안을 했어요. 이틀만에 연락이 왔는데 디자이너팀들도 다 다른 작업을 해서 어렵겠다 해요. 그래서 제작과 유통만 맡아주십시오, 나머지는 사진가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 열다섯명 되는 사진가들한테 사진 보내라고 했더니 1만장이 된 거예요. 닷새 동안 제가 살던 원룸에 후배 대여섯명과 모여서 작업을 했어요. 그렇게 나온 게 예요. 출판사가 도와줘서 정말 큰 판형인데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았어요. 1만원. 이게 사진집으로 드물게 2쇄도 찍었어요. 수익금을 희망버스에 냈지요."

사진작가들은 또 사진을 그냥 내기만 하고요? 그럼 도대체 뭘로 먹고 살아요?

"어차피 이거 못 팔아요. 팔 데가 없어. 하하. 먹고 사는 거는 저 같은 사람은 인권위에서 나오는 잡지(격월간 ) 일하고 대학(성균관대) 강의 하나 나가고 특강도 하고. 다른 친구들은 사보 사외보도 하고. 가끔 프로젝트가 들어와요. 올해는 딱 한 건 했네요. 대구의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요청해서 고려인에 대한 취재를 했어요. 교육비 지출이 없고. 자식이 없으니까. 하하. 가난하지는 않아요. 집을 살 계획이 없으니까 돈을 모을 일이 없고."

사진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덕성여대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어요. 89년에 졸업을 했는데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연극이 재미있을 거 같아서 무작정 그 동네 근처를 갔는데 문호근 선생님이 오페라를 전공하고 와서 집체극 형태로 대학 노천극장에서 많이 공연을 했어요. 90년에 덕성여대에서 재임용 제도가 시행되면서 재임용 탈락 1호 교수가 나와요. (재단에 비판적인) 성낙돈 교수. 그때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라는 집체극을 하게 돼요. 저는 연출보조로 합류했어요. 그때 영상을 담당한 강호준씨하고 친해졌어요. 한번은 친구들이 백두산을 가자고 해요. 그 형이 자기도 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사진을 가르치면 되니까 대여섯명만 모아 달래요. 그래서 우리 새언니까지 집어넣었어요. 저는 관심이 없어 안 들어가고. 그런데 한 명이 빠졌대요. 어디서 한 명을 또 꼬셔와, 아이 알았어 내가 할게. 그래서 카메라라는 걸 처음 잡게 됐어요. 그때 백두산은 못 갔어요. 갑근세를 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중국 비자가 안 나왔어요. 하하. 그리고 임헌영 선생님의 시 교실을 다녔는데 거기 분들이 인도여행을 가자고 해요. 카메라를 들고 갔더니 어떤 사람이 자기를 찍어달래요. 찍어줬더니 오늘 밤에 우리 친척 결혼식인데 놀러오지 않겠니 그래요. 그래서 이게 참 재미있는 도구구나. 내가 말 걸지 않아도 얘(카메라)가 말을 거는구나. 갔다 와서 사보를 하는 이가 제 사진을 보더니 음식 사진, 문신 사진이 재미있다고 아모레 사보에 실었어요. 그래도 직업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진 한 장을 본 거예요. 이라는 잡지를 무료로 편집해주는 사람 사무실에 놀러 갔는데 거기 현대자동차 노동자 같은 사람이 활짝 웃고 있는데 사진에서 냄새가 났어요. 바나나하고 술냄새.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바나나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아버지가 돼지도 키우고 약초도 키우고 사업도 했는데 다 망했어요, 피곤한 일상에 가난한 아버지, 집에서 구박받는, 그런데 술만 마시면 의기양양 그 바나나를 사가지고 들어오시는. 그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웃는 날이 있었겠지, 사진이라는 게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는 거 외의 구석이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93년인가? 그래서 그 사진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서 그 사람을 따라다녔어요. 흑백사진 찍는 법이나 암실 작업을 배우고 싶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공장에 어떻게 들어가는지가 배우고 싶었는데 시위현장만 다녀서 나도 그대로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왜 파리로 유학한 거예요?

"사진을 찍으니까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남대문시장 상가에서 상인들 상대로 식당을 했어요. 그런데 돈 못 버는 사진을 하는 게 미안하니까 거친 일을 하고 거친 일을 하는 게 '쪽 팔리니까' 그럴듯하게 사진적 행위를 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진짜 나와 독대를 해야겠다 싶어서 유학을 떠났어요. 한국에서는 적당한 포지션이 있으니까 안되거든요. 거기 가서도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제가 서양요리도 좀 합니다. 이카르포토라는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료만 했어요."

이카르포토에서 수석을 했지요.

"프랑스에서 버려진 철길에 있는 노숙자들을 졸업작품으로 했고 2000년에 한국에서 있었던 대대적인 이산가족 상봉과 장기수들 송환을 다룬 작품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어요. 포트폴리오에서도 1등 했고 전체에서도 1등. 거긴 심사를 외부 인사를 초빙해서 굉장히 잔인하게 해요. 박물관큐레이터 에이전시디렉터 신문사 편집장, 잡지사 편집장, 이런 사람이 열 명쯤 와요. 수석하니까 세 군데 에이전시에서 러브콜이 왔죠. 저는 외국작업은 관심이 없어서 파리8대학 대학원을 갔는데 교수하고 안 맞아서 결국에는 논문도 거의 다 쓴 상태에서 중단하고 귀국했어요. 2005년에요."

내 사진이 세상을 바꿨다는 걸 느껴요?

"세상은 모르겠고. 파리에 있을 때 초등학교 친구가 친구를 데리고 우리집에 왔어요. 한달을 지냈는데.제 집시 사진 중에 꼬마아이들이 언덕에 점처럼 서있는 사진이 있어요. 제 친구의 친구가 그 사진이 너무 사고 싶대요. 그래서 작게 프린트 된 걸 선물로 줬어요. 한국에 와서 그 친구를 만났는데 너무 고맙대요. 사실 자기 아이가 자폐래요. 말을 안 한대요. 그 사진을 방에 붙여줬는데 아침에 아이가 잠을 깨서 그 사진하고 말을 한대요. 그 다음부터 아이가 화집을 놓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해요."

앞으로 작업은?

"2006년부터 했던 작은 마을 작업인데 2009년부터 현장 다니느라 손을 놓았어요. 내년 하반기까지 현장작업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려고요. 유학 마치고 첫번째로 요양원 해서 라는 사진집으로 정리가 됐고요. 2006년에 한창 한미FTA 이야기가 나올 때인데 내가 농촌을 정말 모르더라고요. 그런데도 보수나 우익진영이 발언하면 무조건 반대하고 습관적으로 발언을 해요. 부끄러워서 김용택 시인한테 시골에 집 하나만 구해 주세요, 그랬더니 빨래도 잘하고 밥도 잘하나 물어서 반찬도 잘한다 그랬더니 당신 어머니가 혼자 산다고 당신 어머니 집에 가서 혼자 살래요. 마침 전주대에서 강의도 해서 전북 임실에 가서 1년 가까이 살았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열두분 정도 계시는 작은 마을인데 무거운 것도 날라드리고 새참도 해드리고 마을도우미였어요. 하하하 좋더라고요. 밤에 잠을 자는데 멀리 있는 소리가 먼저 들리는 걸 처음 알았어요. 강물이 일어나는 소리도 처음 듣고요. 사실 현장으로 다니면 귀를 닫거든요. 전경들 발자국 소리 들리면 막 흥분을 해요. 그러면 이미지는 하품하고 있는데 막 셔터가 눌러지거든요. 그래서 무성영화를 보듯이 관조하는 훈련을 해오다가 다시 귀가 열린 거지요."

원래 하고 싶은 거는 어떤 거였어요?

"시골마을. 그거예요. 산과 강이 있는 마을. 뻘이 있는 마을, 산골 깊숙이 있는 마을, 바닷가 마을을 차례로 하려고요. 여기 사는 분들은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 노동자 분들의 부모님이잖아요. 어렸을 때 삶의 터고. 작게 사는 사람들의 그런 현장이 저는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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