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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10월 26일] 거미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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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10월 26일] 거미 날다

입력
2013.10.2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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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곳이 아닌 어디, 계획도 예정도 없이 바람에 몸을 맡겨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나를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 내려 새 삶을 시작하는 상상. 무모하고 위험한 도전이란 비난이 들려온다. 날짐승이 아닌 이상 그렇듯 멀리 날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통섭의 주창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의 첫 장편소설 에는 몇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어린 거미의 기막힌 여행이 담겨 있다. 우선 거미는 풀잎이나 관목의 잔가지까지 기어오른다. 사방이 트인 곳에 닿은 뒤 실 한 가닥을 공중으로 쏘아 올린다.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실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잡아당길 때까지 기다린다. 그 힘이 체중을 넘어서면,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를 풀잎이나 가지에서 떼고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화담 서경덕은 란 시의 서문에서 이렇게 물었다. "부채를 저으면 바람이 생기는데, 이 바람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서경덕은 부채 속에 바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대공(大空)의 기(氣)가 부채로 인해 물결치듯 움직인 것이 곧 바람이라고 강조하였다. 기(氣)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골짜기의 물처럼 천지에 꽉 차 있다는 주장이다.

부채를 지니지 않은 거미는 바람이 과연 맑고 고요한가 아니면 활발하게 움직이는가를 어찌 알까. 거미가 사용하는 도구는 흥미롭게도 한 가닥 실이다. 공중에 실 한 가닥을 하늘거리게 날려 두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시시각각 측정하는 것이다. 그 실은 거미보다 수십 배 더 길며 얇고 가볍다.

일찍이 시인 진은영은 에서 이렇게 적었다.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온 손가락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일들이 흐르다가 손끝에 닿는 것이다. 두렵지만 매혹적인, 낯선 세계를 만지는 손가락의 끝에서 피어나는 '시간의 잎들'이 곧 시인 것이다.

세상의 기미를 알아차리기 위해 일상에서 가장 멀리 보내놓은 당신의 실 한 가닥은 무엇인가. 겨울잠에 드는 곰처럼 웅크린 채 가진 것들만 차곡차곡 품 안에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혹자는 이렇게 따질 지도 모른다. 운 좋게 날아오르더라도 어떻게 무사히 내려올 수 있겠느냐고.

영화 에서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중력의 힘이다. 우주 귀환선이 지상과 부딪치는 충격을 완화하려면 영화에서처럼 낙하산을 펴 공기저항을 키워야 한다. 다시 윌슨의 소설 으로 돌아가 보자. 비상에 성공한 거미는 물론 활짝 펼 낙하산이 없다. 대신에 땅으로 내리기 위해 거미는 실을 아주 조금씩 먹어 들어간다. 1밀리미터씩 실의 길이를 줄이면서 고도를 낮추는 것이다. 내려갈수록 위태롭다. 나무나 바위에 부딪쳐 죽기도 한다. 그러나 무사히 땅에 내리면 새로운 기회가 거미를 기다린다.

내 집필실 벽엔 김영갑의 사진으로 만든 캘린더가 걸려 있다. 달마다 풍경은 바뀌지만, 사진 속을 가득 채우고 사진 밖의 나까지 흔들어대는 기운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제주의 바람이다. 바람의 사진들을 넘기며 상상한다. 무거운 사진기를 쥐고 홀로 길을 나서는 사내. 어떤 날은 바닷가로 어떤 날은 오름으로 또 어떤 날은 한라산으로 간다. 그리고 예민하게 그렇지만 고요히 기다린다. 오감을 활짝 열어두고 육지와는 다른 바람의 움직임을 느낀다. 드디어 바람이 몰려오면, 바람과 더불어 날고 바람과 더불어 휘돌며 새로운 체험을 완성한다. 병이 깊어 더 이상 걷지 못할 때에도 바람을 타고 오르내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비티 혹은 내게 주어진 절대조건마저 극복하려는 마음! 거미에게 실이었던 것이 김영갑에겐 사진기였다.

인간은 별을 우러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별을 가슴에 품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땅을 열망하며 두 발을 떼는 무모한 짐승이란 뜻이다. 바람이 분다, 날아야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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