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이룩했던 국회의원 10명은 지금은 한 둥지에 있지 않다. 두 차례 분당(分黨) 사태를 겪으며 흩어졌다. 대선 참패에 이은 당내 '종북(從北)주의' 청산 논란 끝에 2008년 노회찬 단병호 조승수 전 의원과 심상정 의원은 당을 떠났다. 이 중 단병호 전 의원을 제외한 3명은 2011년 12월 민노당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해 9명이 다시 한 울타리에 모였다. 하지만 지난해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과 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후 차례로 당적을 정리했다. 2004년 그 10명 중 현재 통진당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영순 전 의원 한 명뿐이다. 하지만 당적이 있든 없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진보의 재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초심으로 진보 토대 구축"
탈당과 함께 일선 정치를 떠난 이들은 자신이 진보활동을 시작한 뿌리로 돌아가 있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분당과 정파논란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농민운동가 출신인 강기갑 전 의원과 현애자 전 의원은 다시 흙을 만지며 살고 있다. 지난주 전화에서 강기갑 전 의원은 "지금은 밭에서 일하고 있어서 통화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튿날 다시 연락을 하자 그는 농사 얘기에 열을 올렸다. "다양한 매실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매실잼 매실고추장 매실청…. 매실이 소화에도 좋고 건강에 좋다. 제초제나 농약을 일절 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지난해 9월 통진당 분당 등에 책임을 지고 당대표에서 물러나면서 탈당한 그는 고향인 경남 사천으로 돌아가 매실농장을 일구고 있다.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지만 7월 충북 음성에서 열린 한우인총궐기대회에는 '정치인이 아닌 농사꾼 자격으로'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이석기 의원 사태와 진보의 위기에 대해 "원대 복귀 해서 농사짓고 있는 입장에서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통진당 당원들을 보면 정말 훌륭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많은데 이런 당원들까지 싸잡아 비난을 당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애자 전 의원도 "지난해 5월 통진당 중앙위 폭력사태가 나던 날 탈당 입장을 정했다. 도민들 볼 면목이 없어 1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월 고향 제주에서 '언니네텃밭'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길게 내다봐야겠다고 나름 반성을 했다. 대형유통 시스템에서 벗어나 소비자에게 직접 제철채소를 공급하는 대안농업이 풀뿌리 진보정치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진보정당은 이런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동안 당적 없이 지내다 8월 정의당에 가입한 그는 "아직 제주도당도 없고 정치활동은 안 한다. 진보정당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다시 다가가려면 삼고초려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병호 전 의원은 10명 중 가장 먼저 정당 정치를 떠났다. 2008년 2월 민노당 분당 사태 때 탈당한 그는 진보신당에 합류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과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내며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그는 노동운동으로 돌아갔다. "탈당 후 각 지역을 돌며 동지들과 의견을 나눴다. 노동 쪽이 튼튼했으면 분열도 안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적은 정리했고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시기도 지난 것 같고…. 내 역할은 아래로부터 노동운동의 역량을 재구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2011년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을 창립해 노동조합 활동가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3, 6개월 과정으로 나뉜 교육프로그램은'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토론식으로 운영되는데, 지금까지 5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지난해 9월 권영길 전 의원과 통진당을 떠난 천영세 전 의원이 현재 갖고 있는 유일한 직함은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다. 1990년 전노협 출범 때부터 민주노총까지 줄곧 지도위원을 맡아온 그의 별칭은 '천지도'다. 그는 "지방에서 요양 중이다. TV도 없고 신문도 없다. 살면서 이렇게 쉴 계제가 없었다. 지도위원은 상근도 아니고 계속 해오던 거라 내놓기도 그렇고…. 민주노총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에 갈 때 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나누는 기회를 더러 갖는다"고 말했다.
최순영 전 의원도 지역기반인 부천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부천시친환경무상급식센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안에너지 운동인 부천햇빛발전소 협동조합에 동참하고 있다. 진보정당 내 정파를 거론할 때 권영길 전 의원과 함께 중도파로 분류되는 그는 "2008년 분당 때도 비상대책위 집행위원장을 했고 중간 조정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계속 남아 있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지난해 경선부정 사태 때는 너무 화가 났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통진당을 떠난 그는 "다 내 탓이오라는 생각도 들고 점점 지역에서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진보가 노동자 농민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더 다양한 곳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 정당에서 "진보 정체성 재구성"
새 정당을 만들어 현실 정치에서 진보의 재구성을 도모하는 이들은 초심의 열정만큼이나 정치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친북정파와 이석기 사태에 대해서도 또렷한 비판 입장을 보이며 진보정치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했다.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조승수 전 의원은 줄곧 정치행보를 함께했다. 이들은 2008년 민노당 분당사태 때 진보신당을 건설했고, 지난해에도 통진당을 떠나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주도적으로 창당했다. 2004년 민노당 국회의원 10명 중 유일한 현역 의원인 심상정 의원은 분당을 반복한 것에 대해 "결국은 판단착오로 끝났다. 노선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없었다는 점에서 실패에 대한 지적은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보의 이합집산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는데 분열이 진보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부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치적 능력과 리더십이 대단히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흔히 PD(민중민주계열)로 평가되는 이들은 이제 진보세력이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에서 당선됐지만 '삼성 떡값 검사' 명단 공개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전 의원은 "운동권이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에 역할을 했지만 변화한 상황에 맞게 새롭게 거듭나야 했는데 아직도 1980년대 식으로 NL(민족해방계열)이니 PD니 하며 낡은 이념 틀에 갇혀 분열적인 정파투쟁에 매몰돼 있는 것이 문제다. 일부 정파는 대중의 요구보다 자신들의 이념을 우선시하며 북한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편향된 태도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진보가 친북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몸집불리기 식으로 더 많은 세력이 함께하면 더 힘이 생긴다는 방식의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그보다 어떤 진보냐는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의당 울산시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조승수 전 의원은 이석기 사태에 대해 "낡은 운동권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단기적으로는 진보 세력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진보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도 "이석기 사태는 진보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하게 정리했다는 면에서 중요한 전기가 될 수 있다. 이제 진보는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국민과 더불어 진보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아서 "마녀사냥식 비판 안돼"
2008년 민노당 분당 사태 때도 지난해 통진당 탈당 사태 때도 이영순 전 의원은 당적을 유지했다. 정파적으로는 NL 계열인 울산연합으로 분류되는 그는 지난해 5월 통진당의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 때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 소속 이석기 의원 등의 사퇴에 동의했지만 당을 떠나지는 않았다. 몇 차례 거부 끝에 말문을 연 그는 "힘들게 만든 당이기 때문에 나가는 게 쉽지 않고 남은 사람이라도 더 좋은 진보정당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석기 의원 사태에 대해 "대중의 요구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진보를 비난하려고 침소봉대하고 마녀사냥 식으로 달려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당을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그는 당을 떠난 동료들에 대해 "남든 나가든 진보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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