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음 받았을 때의 흥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뉴밀레니엄의 벽두에 신문사로 배달돼 온 신간의 표지는 고딕 스타일의 굵은 책 제목이 뒤덮고 있었다. 처음 본 북디자인 아닌 북디자인에 잠시 압도 당하면서 펼쳐 본 내용은 가슴 뛰고 눈시울 붉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책을 만든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1970년대 노산 이은상이 엮은 납활자본 책을 읽다 '거침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고 한 격정적인 독서 감상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책은 창작물이 아니라 기록물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벨기에제 M1900형 브라우닝 권총 세 발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고 체포된 안중근에 대한 일본 검찰관의 신문 기록과 이듬해 2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공판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의거의 목적과 경위를 담고 있으므로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역사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왜 이처럼 새롭고 감동적일까. 보태고 뺄 것 없이 그대로 옮겨 놓은 기록이 검찰 조사나 공판 현장에서 안 의사의 육성을 듣는 듯한 현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조목조목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을 지적하고 동양평화라는 숭고한 뜻을 펼쳐 보이는 그의 높은 기개와 열렬한 조국애가 날 것 그대로 전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중근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은 또 무슨 말인가. 마침 해군과 해경이 합동으로 독도방어훈련을 실시했다는데, 일본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이기웅 대표는 초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슬프다. 살아가는 우리 삶의 형국을 보라. 안일함과 무기력함,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부패, 점점 더해 가는 비인간적 개인주의, 방만한 소비생활, 자연 파괴, 그리고 줏대 없이 부유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행태를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안 의사의 혼과 정신이 커다랗게 느껴진다." 바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 해야 한다고 이 대표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 의사도 검찰 신문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미워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며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지고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던 2010년 나온 개정판에 초판에 없던 영국 화보신문 '더 그래픽'의 안중근 공판 참관기가 실렸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안중근은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며 영국 기자는 이렇게 기사를 마무리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그처럼 공들여 완벽하게 진행하고 현명하게 처리한, 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본식의 한 유명한 재판 사건은 결국 암살자 안중근과 그를 따라 범행에 인도된 애국동지들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닐까."
안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장졔스가 "중국의 백만대군도 못해 낸 일을 단신으로 해냈다. 장렬천추(壯烈千秋)"라며 칭송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런데 최근 우편향으로 논란인 교학사 고교 교과서는 이 사건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207쪽)는 짧은 한 줄로 요약한다. 다른 교과서들에 대부분 실려 있는 그의 얼굴 사진도, 단지동맹 때 잘라내 약지 한쪽 마디가 없는 왼손 손바닥 낙관도 보이지 않는다. 실수가 분명하겠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색인에는 이토 히로부미는 있어도 안중근은 없다. 최근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무더기로 내용 수정ㆍ보완 권고를 하면서도 이런 문제는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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