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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닭갈비…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 속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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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닭갈비…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 속의 시

입력
2013.10.2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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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권혁웅(46)은 미래파 시인들의 산파였던 평론가 권혁웅과 달리 전통 서정시의 자장 아래 머물러 왔다. 패러디, 연애시, 정치풍자시를 거쳐온 그는 이제 시의 거처가 세속이라고 믿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로 일상시의 새 장을 열어젖힌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는 그래서 신의주찹쌀순대를 비롯해 도봉근린공원, 주부노래교실, 천변체조교실, 금영노래방, 불가마, CGV, 의정부부대찌개, 김밥천국 같은 세속의 공간들을 끊임없이 주유한다. 이 공간들이 그대로 표제가 되는 시들은 재기와 유머가 흘러 넘치고, 그때마다 불가피하다는 듯 슬픔이 조금씩 튄다. '춘천닭갈비집에서'의 화자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앞치마를 두른 채 조금 튄, 당신의 슬픔을 받아내는 일"이라고 말한 것을 이 시집 전반에 적용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소시민적 인물들을 통해 시인이 펼쳐 보이는 일상의 세목들은 세속의 만화경이라 할 만하다. 그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으로 즐겁고 참으로 짠하다. 시인은 캡을 쓰고 마스크를 한 '천변체조교실'의 중년 아줌마를 보며 "이 저녁의 양생법이란, 견갑골 깊숙이 찔러 넣은 내 손이/ 내 등을 안는 식"임을 깨닫고, '의정부부대찌개집'에서는 "인연이란 잠시만 한눈팔아도 불어버리는/ 라면사리 같은 것"임을 알아챈다. 순댓국을 마주하고 앉은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순대처럼) 토막 나 있다."('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청춘의 해돋이가 아니라 노년의 일몰에 주로 가 닿아 있다. 그래서 시집의 가장 울림 깊은 대목들은 어머니를 노래한 시들에서 주로 나온다. 이제는 나이가 든 아들은 목디스크로 오른손이 저리는 어머니를 일러 "새벽 기도 20년 만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되었다"고 눙친다. 이어 스치기만 해도 저릿저릿한 늙은 어미의 손을 두고 "처음 집 앞 놀이터로 아버지가 찾아왔던/ 57년 전과 똑같다고, 그때 스친 손끝 같다고 한다/ 다소곳한 고개를 다시 들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첫사랑')고 노래한다.

"삼년째 돈을 붓는 아마곗돈 회원들"('불가마에서 두시간')이나 "가당치 않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얼토와 당토야말로 귀신의 영토"('몸 속을 여행하는 법 2') 같은 능란한 말놀이가 보여주는 시인의 기지 넘치는 면모는 풍자시 '오호십육국'에서 기어이 폭발한다. "동쪽 끝에 이르면 해가 뜨지 않는 나라가 있는데 이를 피씨국(彼氏國)이라 한다 이곳 사람들은… 팔이 셋인데 그중 하나는 마우스다/ …서쪽으로 더 가면 엄친국(嚴親國)이 나온다 이곳 사람들은 자웅동체여서 후손을 낳을 때가 되면 혼자서 자기 방에 들어간다 이 방을 선우라 부른다"

이 시집은 따스하다. 그 따스함에 위로를 받지 않는 일은 어떤 냉정한 독자라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지난해 미당문학상 수상작인'봄밤'의 샐러리맨은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이 아니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 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온 것이다.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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