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그림은 달력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게 되는 달력의 특성상 거기에 쓰이는 그림이나 사진에는 '눈에 거슬리지 않을 것', '특정한 감상을 유발해 일상을 흩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 조건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여기 매일 불편한 풍경을 마주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있다. '빛에 빚지다' 달력을 만드는 이들과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들이다.
'빛에 빚지다' 프로젝트는 2009년 용산 참사를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현장에 머물면서 희생자들의 절규를 목격한 사진가들이 '이 비극의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찾아보자'는 데 뜻을 함께한 것. 그렇게 탄생한 모임이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이다. 사진가뿐 아니라 시인, 작가, 기획자, 디자이너까지 가세한 이 모임은 매년 연말이 가까워지면 주제별 사진을 담은 '빛에 빚지다' 달력을 제작해 판매한다.
달력의 주인공은 거대 자본에 짓밟힌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2010년에는 용산 참사 희생자 유족, 2011년에는 기륭전자 분회 비정규 노동자, 2012년 쌍용차 해고 노동자, 2013년에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의 모습이 달력에 담겼다. 달력을 판매해서 나온 수익금은 실 제작비를 제외하고 사진의 주인공이나 그들의 유가족이나 연대를 필요로 하는 단체에 전달된다.
뚜렷한 유통망 없이 먼저 주문을 받아 제작ㆍ판매하는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구매를 문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해 만들어지지도 않은 달력을 사겠다고 나선 사람은 741명. 총 판매액 3,300여만원 가운데 1,000만원은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게, 400만원은 장기 투쟁 사업장에 전달됐다. 출시 이후에도 달력은 계속 팔리지만 먼저 구매한 사람은 달력에 이름을 올리는 특전을 누릴 수 있다.
달력의 유일한 오프라인 판매처인 서울 통의동 류가헌은 달력 출시에 맞춰 그간의 사진을 한 데 모아 전시회를 연다. 15~27일 열리는 전시회에는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모임이 지난 5년 동안 거쳐간 현장 사진들이 집대성된다.
2014년 새해 달력의 주인공은 현대차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2003년 월차 휴가를 내려다 폭행 당해 입원해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를 회사 관리자가 찾아와 식칼로 발목을 그은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지 벌써 10년째다. 아직까지 노동3권을 인정하라며 싸우고 있는 이들의 처절한 모습은 달력 구매자들의 집 벽에 걸려 내년 내내 불편한 외침을 계속할 것이다. 문의 (02)720-2010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