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역시 배심원들의 의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
24일 오전 1시45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서 김환수 형사합의27부 부장판사가 이같이 판결하자 방청석에선 환호가 터졌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주진우 시사IN 기자와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진행자 김어준씨의 국민참여재판 결과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이 펼친 27시간여의 대접전은 이렇게 변호인 측 승리로 끝났다.
주씨와 김씨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육영재단 운영권을 놓고 갈등하던 중 살인 교사 논란에 휩싸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앞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결과에도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번 판결을 통해 '정당한 의혹 제기'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주씨는 한 출판기념회에서 박 전 대통령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해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뜻을 따른다'는 취지만 밝혔을 뿐 판결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재판부가 배심원 평결을 꼭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별도로 "피고인들이 '지만씨가 살인 교사를 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고 경찰 수사 결과에 의문이 있는 점, 주씨의 출판기념회 발언에 고의성이 없다는 점 등이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판결 이유와는 별개로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형식이 무죄 선고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선거법 위반 혐의에선 후보자에 대한 고의적인 지지ㆍ비방 등이 유ㆍ무죄 판단의 기준인데, 여기서 지지ㆍ비방에 대한 사회적 통념, 즉 상식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배심원들은 고의적 지지ㆍ비방의 범위를 판사들보다 좁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 팝아티스트 작가 이하(45)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국민참여재판에서도 재판부는 배심원들 의견을 존중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배심원들은 이씨가 박근혜 대통령을 독사과 든 백설공주로 표현하는 등 패러디 포스터를 붙인 것에 대해 '선거 개입 의도'를 강조한 검찰과 달리 "후보자 지지ㆍ비방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결했다.
공안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한 판사는 "공직선거법의 경우 사회적 통념이 많이 작용해 가급적 배심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려 한다"며 "살인죄 같은 경우는 법리적인 부분을 주로 봐야 하지만 선거법은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사실관계를 엄격히 따지는 살인 등 강력범죄 사건에서는 국민참여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날 서울동부지법 형사11부(부장 정선재) 심리로 열린 김모(66)씨의 살인 미수 사건에서는 배심원 7명 모두 유죄 평결을 내렸다. 월세가 밀려 방을 빼라고 독촉하는 고시원 총무에게 흉기를 휘두른 김씨는 궁핍한 경제사정 등으로 인한 우발적 범행임을 부각시키려 했으나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검찰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진행되는 국민참여재판에서 변호인에 비해 설득의 기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나꼼수 재판에서 변호인 측은 평결 직전 이뤄진 최후변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배심원들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하루 또는 이틀에 모든 재판 과정을 소화한다. 이 때문에 가장 중요한 평결을 내리는 순간 배심원들이 극도로 지쳐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꼼수 측 변호인들은 이런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변론 전략을 짰다. 딱딱한 법률 용어 대신 일상 용어를 쓴 것은 물론 사건과 관련한 잔인한 장면 사진을 그대로 노출하는 대신 삽화로 대신해 주장하고자 하는 부분만 강조했다. 수년간 복잡하게 얽히면서 파편처럼 흩어진 개별 사건들에 관한 의혹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드라마 줄거리를 요약하듯 들려주며 피고인들의 의혹 제기가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한 방청객은 "최후변론이 밤 늦게 1시간 동안이나 진행됐지만 변호사가 제시하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어준씨는 사전답사 차원에서 이하씨의 국민참여재판을 직접 방청하기도 했다.
반면 검찰 측은 책 읽는 듯한 어조로 난해한 판례와 법 조항을 나열해 일부 배심원들이 하품을 하기도 했다. 검찰 측은 "피고인들은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허위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무죄를 선고한 것은 부당하다"며 즉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