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에서 난민신청자에 관한 의미 있는 결정 하나가 내려졌다. 사안은 이렇다. 한 미얀마 국적을 가진 사람이 미얀마군부의 탄압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군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출입국에 난민인정 신청을 하고 생계를 위해 취업허가 없이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난민신청자에게 취업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취업허가 없이 일을 하다가 출입국사무소의 단속에 걸려 강제퇴거명령을 받고 외국인보호소에 구금을 당하였고, 공익단체의 도움을 받아 강제퇴거명령 집행정지신청을 제기하였다. 이에 관해 법원은 "정부가 난민신청자에 대하여 아무런 생계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상황에서 취업활동을 일체 불허하는 것은 난민 신청자의 생존을 난민지원 비정부단체나 자선단체 등의 호의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하여야 할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였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에 관해 다른 얘기를 또 하고 싶다. 최근 한 주간지에 어느 장애인 청년의 죽음에 관한 글이 실렸다. 중증장애인이었던 그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애인야학에서 한글을 배웠다. 말을 하지 못해 할 말을 글씨로 써야했지만 쓸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았다. 계단이 없는 집이 필요했고, 고장 난 전동휠체어를 교체해야 했으며, 여자친구가 없던 그는 야학에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답신 없는 전자우편을 계속해서 보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앞의 난민신청자에 관한 사안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이고, 뒤의 장애인의 안타까운 죽음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사안 같지만 인간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존엄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의 조건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먹을 것과 주거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난민신청자의 신분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생계지원 없이 취업허가도 내주지 않는 것은 굶어죽거나 빌어먹으라는 것이다. 문명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한국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굶어죽을 위험에 놓여있지 않거나 빌어먹고 살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함이 지켜지는가? 그렇진 않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한 최우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엄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실현해가면서도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인간은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상호의존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적 관계망이 원활히 작동되어야 인간은 존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고 고립될 때 삶이 위태로워지고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불안해지고 비참해진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못할 때 느끼는 공포감과 고립감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거나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회는 온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법인 헌법 10조에 명시된 최고의 가치도 바로 인간의 존엄함이다. 어떠한 권리와 자유보다도, 어떠한 재산권과 편리함보다도 앞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리고 지켜야 할 가치는 우리 개개인의 인간의 존엄성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한국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 가치롭게 여기지 않고 있다. 난민신청자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있고, 중증장애인의 사회적 관계를 외면하고 있으며, 수도권의 공익을 위해 밀양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수많은 이들이 자의로 타의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존재이유는 사회구성원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에 있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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