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간자나 시폰 등 얇은 천으로 만들어 속옷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시 스루'(See-through) 의상, 옷에 절개를 넣어 안감이나 피부가 보이게 한 '컷 아웃' 장식이 있는 옷. 목에서 어깨까지 노출한 '오프 숄더' 상의까지. 내년 봄과 여름에 '옷 좀 입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올해 구입한 이들 유행 의상들을 잘 보관해 두는 게 좋겠다.
찬바람에 옷깃을 꼭꼭 여미게 되는 요즘이지만 패션 업계의 가을은 뜨겁기만 하다. 18~23일 서울 여의도의 IFC 서울과 여의도공원에서 내년 상반기 패션 동향을 제시하는 '2014 봄/여름 서울패션위크'가 열렸다. 일부에서는 패션을 현실과 동떨어진 분야로 여기기도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패션 트렌드에는 치열하게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읽어 낸 디자이너의 고뇌가 담겨 있다. 특히 이 같은 트렌드는 현대인 삶의 매 순간에 반영되면서 점차 사회 문화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번 패션위크는 상반된 콘셉트가 뒤섞인 스타일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야구 점퍼를 본뜬 듯한 편안함이 돋보이는 의상에 여성스러운 프릴 장식 등을 덧댄 소위 '로맨틱 스포티즘' 의상 등이다. 단순한 디자인에 올해 봄ㆍ여름에 인기를 끌었던 컷 아웃, 시 스루 디테일이 가미한 '화려함을 더한 미니멀리즘' 의상도 많았다.
특히 이번 행사는 서울을 아시아의 패션 허브로 도약시키는 발판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싱가포르, 태국 등 아시아의 유망 디자이너들 작품에도 캣워크를 내줬다. 쇼를 외국 바이어의 주문으로 연결하기 위해 15개국 60여명의 외국 패션언론과 바이어도 초대했다.
소재도 콘셉트도 믹스&매치
우선 뉴욕, 파리 등 세계 주요 패션위크의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실용성을 강조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의상이 눈에 띄었다. 행사 셋째 날인 20일 무대에 오른 박승건 디자이너의 '푸시버튼'은 해골 프린트, 물방울 무늬, 체크 등 다양한 패턴을 적절히 사용한 위트가 느껴지는 의상을 선보였다. 남성적인 느낌의 옷에 여성스러운 장식을 덧대거나, 실크와 니트, 메시 소재를 적절히 섞는 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러 콘셉트를 자유로이 교배한 디자이너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쇼였다.
넷째 날인 21일 패션위크의 화제는 '스티브J&요니P'의 부부 디자이너 정혁서, 배승연씨였다. '블랙 앤드 화이트'가 바탕이 됐던 이번 패션위크에서 주황, 초록, 보라 등 선명한 색상들로 채운 무대는 단연 눈에 띄었다. 메인 모티프였던 유니콘 프린트와 형광색 톤으로 재해석된 카무플라주(군대 위장복에 사용되는 무늬) 패턴이 눈길을 끌었다. 내년 봄/여름 시즌 불어닥칠 스포츠 패션의 열기를 반영한 듯 쇼를 마친 후 디자이너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런웨이에 등장하는 이색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디자이너 지춘희씨의 여성성을 강조한 의상은 올해도 어김 없이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합창단까지 동원한 라이브 퍼포먼스를 곁들인 쇼 진행도 화제가 됐다. 짧은 팬츠와 미니드레스, 쇼트커트 등으로 대표되는 패션 전성기 1980년대의 영광을 재해석한 아이템들이 눈길을 끌었다.
'빅박'(Big Park)의 새 의상을 선보인 박윤수 디자이너를 비롯해 '제너레이션 넥스트'에 참여한 태국 브랜드 '원더 아나토미' 등은 동양 특유의 정서가 반영된 과감한 프린트로 시선을 모았다. 박윤수 디자이너의 의상은 민속화를 모티프로 하면서도 가죽과 실크, 면 등 각기 다른 소재를 조화롭게 활용한 이번 시즌 여러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특징도 함께 지녔다.
기대 높이는 남성복의 진화
전반적으로 간결한 실루엣에 소재와 색상으로 디테일을 강조한 남성복은 눈에 띄는 특정 디자이너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았다. 북미, 유럽에 비해 유독 높게 나타나는 한국 남성 소비자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18일 패션위크 첫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이주영 디자이너의 '레쥬렉션'(RESURRECTION)은 주로 남성의 신체 분할에 중점을 둬 몸이 돋보이게 하는 의상이었다. 올해 남성복은 여성복과 거의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부분이 많았다. 레쥬렉션의 경우 여성복에 자주 등장하는 오간자, 실크, 메시 소재 등을 활용한 시 스루 의상을 과감히 무대에 올렸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되는 검정, 회색 등 무채색의 유행이 반영됐지만 주황, 녹색 등을 포인트 색상으로 더했다.
지난 봄 열린 2013년 가을/겨울 패션위크에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권문수 디자이너의 '문수 권'(MUNSOO KWON)은 내년 브라질 월드컵의 열기를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축구에서 영감 받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스트라이프 패턴이 들어간 재킷이나 시어서커 소재의 슈트와 광택 소재의 짧은 재킷 등은 관람객의 모습, 승리의 트로피 등의 상징이었다. 색상 역시 검정과 흰색, 남색 등 기본 색상을 중심으로 초록과 노랑, 빨강 등 축구장의 여러 색상들이 조화롭게 녹아 들었다.
서울, 아시아 패션의 중심 될까
이번 쇼는 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유망 디자이너들의 출현으로 풍성함을 더했다. 22일에는 벌써 4회째 참가하는 6개 싱가포르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패션쇼가 열렸고, 태국, 중국 등지의 디자이너들은 '제너레이션 넥스트' 부문에 참가해 재능을 뽐냈다. 공교롭게도 가요 한류의 영향으로 아이돌 등 한국 가수들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이들이 즐겨 입는 한국 디자이너의 제품을 찾는 외국 소비자가 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아시아 패션의 중심'은 서울만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일년 내내 반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 당연시되는 열대 지역 싱가포르마저도 정부가 나서 패션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의 패션은 아직은 세계 패션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현실이다. 이번 패션위크 기간 중 열린 아시아 패션 포럼에 참석한 유니클로 CFO 출신의 오니시 히데츠쿠 센신 캐피탈 CEO는 "SPA(제조ㆍ유통 일괄화 의류)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패션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고가와 저가 사이 아직 개척되지 않은 틈새를 공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패션위크 현장에서 만난 외국 바이어들이 박수를 보낸 브랜드도 이 같은 설명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홍콩 하비 니콜스 백화점의 시니어 바이어 록항 찬씨는 "기존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느껴졌다"며 푸시버튼을 인상적인 쇼로 꼽았다. 서울패션위크에 처음 참석한 미국 삭스 핍스 애비뉴 백화점의 시니어 바이어 홍코니씨는 "한국에 재능 있는 패션 디자이너가 많아 놀랐다"며 '더스튜디오K' 등을 인상적인 쇼로 꼽았다. 그는 "현장 분위기가 좋은 쇼는 대부분 한국 시장에서 이미 높은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인 경우가 많았다"며 "패션의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국에서 먼저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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