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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연유산 제주 거문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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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연유산 제주 거문오름

입력
2013.10.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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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톡,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며 걸었다. LTE는 움푹한 분화구 속에서도 잘 터졌다. 검색어 '거문오름'. 이곳저곳 포스팅된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비슷비슷한 사진과 비슷비슷한 감상, 그리고 무단으로 긁어다 붙인 것이 분명한 '위키피디아스러운' 지식. 다음(Daum) 블로거 'dou****'씨의 글이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제목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제주 거문오름'. 내용 중 일부를 옮겨 적자면 이렇다.

"무지한 제가 탐방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며 이곳을 탐방하는 조건에 맞으려면 풍수지리를 알아야 하고 제주 역사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거문오름에 자생하는 나무와 풀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거문오름은, 아예 출입이 금지된 물찻오름과 도너리오름을 제외하면, 제주에서 탐방이 제한적인 유일한 오름이다. 하루 탐방 인원 400명. 이틀 전까지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하는데, 휴가철이나 주말에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러니 탐방 기회를 잡은 사람은 잔뜩 기대를 하게 된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일까?' 십중팔구 그 기대를 다 채우지 못한다. 수목이 우거졌다는 사실 외에 특별함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지난 주말, 여행기자라는 직업을 십분 남용하여 빨간색 출입증(해설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반 탐방객의 출입증은 파란색이다)을 목에 걸고, 아침 여섯 시 반(입장 가능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다) 거문오름에 올랐다. 하지만 자연휴양림의 산책로 같은 울울한 숲 속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도 이 오름만의 특별함이 뭔지는 아리송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꺼내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 끽.'

처음엔 꿩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소리가 계속됐다. 사슴과 짐승의 소리인 듯한데 아파서 내는 비명이 분명했다. 제주도에 사는 사슴과라면 노루일 것이다. 그런데 노루도 산을 타다 다리가 부러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탐방이 끝난 뒤 풀렸다. 어쨌든 그 소름 돋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직 해도 완전히 떠오르기 전, 인적 없는 깊숙한 숲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새삼 또렷해졌다. 나무 그늘로 머리 위가 컴컴했다. 등골이 서늘해서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거문오름의 '거문'은 검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말 '검다'는 본래 크다, 신령스럽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단군왕검의 '검'도 같은 말이다. 이곳의 돌과 흙이 음산하리만치 검은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 지금은 1970년대 조림한 삼나무와 측백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 그 가운데 난 탐방로가 대낮에도 온통 어둑하다. 이 오름에 얽힌 근현대사 또한 어둑하다. 거문오름에는 군데군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갱도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군사시설이다. 이 갱도는 4ㆍ3사건의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의 은신처로 쓰이기도 했다.

거문오름의 탐방로는 짜부라진 S자 형태로 이어진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태극길이다. 출발점인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삼나무 군락지 능선을 따라 정상(456m)을 거치고, 용암협곡에서부터는 다시 방향을 꺾어 말굽 형태 분화구 속을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게 된다. 분화구 내의 식생은 제주의 원시림인 곶자왈에 가깝다. 노루의 비명을 들은 곳은 분화구 안, 붓순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는 곳이었다. 쫓기듯 잰걸음으로 원시림 속을 걷는데 주변이 밝아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려왔다. 그제야 보였다. 나무를 감고 오르는 덩굴들, 철모르고 뒤늦게 핀 수국, 이름을 모르는 야생화들…

전망대가 설치된 분화구 내 조그만 알오름에 오르자 천지 사방이 모두 나무였다. 고요하고 깊고 웅장했다. 되도록 오래 머물고 싶은 숲이었다. 거뭇한 두려움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거문오름은 사실 만장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 이 오름이 분출하면서 생겨난 동굴계의 시발점이라는 이유에서 동굴과 함께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유산급' 풍광을 기대하고 찾아갔다간 그래서 실망하곤 한다. 하지만 관광객과, 관광객만큼이나 많은 테마파크로 시끌벅적한 제주도에서, 이만한 호젓함을 품은 숲이라는 이유만으로 세계유산의 타이틀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영검스러운 숲이다.

사족. 노루에 대한 얘기다. 나오는 길, '2013 거문오름 휴휴 페스티벌' 행사장에서 안면이 있는 제주도의 사진작가 권기갑씨를 만났다. 반갑게 악수하자마자 노루 얘기를 꺼냈다. 아마 들개가 물어 죽인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천적이 없는 야생 노루는 지금 제주도의 농사를 망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한때 농가에서 개를 풀어 잡았는데 지금은 금지됐다. 하지만 도망친 개들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 들개가 됐단다. "근데, 개가 짖지도 않아요?" "무서운 놈들이야. 야생으로 돌아갔으니 굳이 주인 들으라고 짖을 필요가 없지." "…" "식겁했나 보구먼, 허허. 그러게 새벽에 왜 혼?거길 들어가?"

■ 거문오름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번영로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세계자유산센터에서 내리면 된다. 렌터카를 빌렸다면 '조천읍 선흘리 478번지' 입력. 탐방 2일 전까지 전화(064-710-8981), 1일 전 오후 5시까지 인터넷(wnhcenter.jeju.go.kr) 예약 필수. 입장료 2,000원.

제주=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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