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덩어리도 늙는다. 불쑥 솟아올라 산이 되고 골짜기가 됐다가 수수만년 깎이고 문드러져 마침내 평지가 된다. 이른바 침식윤회다. 한반도 지형은 그 과정 중 노년기에 속한다. 늘그막의 땅덩이가 순하고 후덕해 지진 같은 흉사가 적고 농사짓기에 좋다. 대신 젊음의 기운이 덜하다. 일테면 이런 것들. 유럽대륙의 비행기들을 한꺼번에 주저앉혀버린, 이름도 혈기방장한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야틀라이외쿠틀(Eyjafjallajökull)화산, 탁해진 눈과 마음과 영혼에 태양의 세례, 혹은 빛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미국 앤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 그런 에너지와 섹시함을 기대하기에 한반도는 너무 나이가 많다.
한반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반도에서 뚝 떨어진 화산섬, 제주도에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곳 지형은 젊다. 물속에 잠긴 모래층을 뚫고 처음 마그마가 솟아오른 게 180만년 전, 용암이 겹겹이 쌓이면서 방패 모양(순상화산)이 형성된 게 55만년 전이다. 성산 일출봉, 송악산 등이 솟은 것은 불과 수천년 전. 그 뒤로도 화산 활동은 계속됐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목종 5년(1002년)과 10년(1007년)에도 화산 분출이 있었다. 비바람에 깎이고 퇴적층에 덮이기 이전 뜨거운 지구의 얼굴을, 그래서 제주에 오면 확인할 수 있다. '살아있는 지질학 교과서'. 제주도가 지닌 또 다른 면목이다. 그 교과서를 한번 펴 보자.
제주도 서쪽 끝에 있는 수월봉은 이름이 덜 알려진 곳이다. 제주올레 12코스가 지나면서부터 외지인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곳에 해외 화산학 전공서적에도 실릴 만큼 중요한 화산 지형이 있다. 학술용어로 하면 '수성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응회환'. 물속에서 터진 화산의 재가 가스와 뒤섞여 무척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쌓인 지형이란 뜻이다. 마그마의 분출 형태는 물과 만나면 더 격렬해진다고 한다. 어렵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 영화 '동사서독'을 떠올려보자. 장검을 든 장국영의 등 뒤로 불던 사막의 무지막지한 모래폭풍, 그걸 그대로 고체로 응결시키면 수월봉 응회환이 될 것이다. 장엄하고 드라마틱하다.
올레길에 있는 부분도 멋있다. 하지만 진짜 '취생몽사'의 풍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고산리 선사유적지에서 신도리 방향 동쪽 해안도로를 걷다가 만나는 첫 번째 해녀탈의장 입구, 거기서 가파른 비탈길로 내려가 다시 서쪽을 향해 300~400m 걸으면 된다. 탐방로가 따로 없는 바위 해변이라 걷기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가봐야 한다. 1만8,000년 전 불과 물이 만나 천지를 뒤흔들던 괴성이 깎아지른 절벽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응회환의 최고 높이는 70m에 이른다. 2010년 제주가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Geopark)'으로 선정될 때, 제주도는 수월봉을 대표 지질명소 9개 중 마지막으로 꼽았다.
용머리 해안은 산방산 아래 있다. 산방산과 함께 나란히 대표 지질명소에 포함됐다. 봄마다 유채꽃밭의 배경으로 관광객들의 사진에 등장하느라 바쁜 산방산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다. 갔다가 헛걸음을 할 확률도 높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 5시30분)까지 개방하지만 썰물 때만 입장을 허용한다. 그래서 하루 중 탐방 가능 시간은 3~4시간에 불과하다. 파도가 높을 때도 입장 불가. 찾아갈 땐 물때와 바다 날씨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여하튼 한번 가보면 이국적인 풍경에 놀라게 된다.
이곳도 응회환이다. 하지만 오랜 침식을 거치면서 수월봉과는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 마그마가 분출된 건 약 100만년 전. 이후 영원과도 같은 세월 바다의 쓰다듬음을 받아 지금의 모습이 됐다. 3개의 화구에서 분출된 화산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숭숭 구멍이 뚫리고 더러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듯 거꾸로 쌓여 있는 것이 외계의 풍경 같다. 요즘은 돈 많은 중국인 신혼부부들의 해외 원정 웨딩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다. 그 또한 외계의 풍경 같긴 일반. 다른 명승지라면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법한 좌판의 멍게 써는 모습이, 그래서 이곳에선 밉지만은 않다. 최소한 그건 한국의 풍경임이 분명하다.
서귀포층은, 시내에서 무척 가까운 위치나 평범한 해안 절벽 같은 외관으로만 보자면 명소라는 호칭과 가장 멀어 보이지만, 밖으로 드러나 있는 제주도의 지형 중 지질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천지연폭포 주차장 바깥, 관광 잠수함 타러 가는 길 오른쪽 해변에 약 1.5㎞에 걸쳐 노출돼 있다. 제주도의 지각은 대략 네 층으로 구성된다. 맨 아래층은 기반암, 그 위는 화산활동 이전의 대륙붕 시절 흙과 모래가 쌓인 퇴적층(미고결퇴적층)이다. 다시 그 위가 서귀포층인데 화산활동 초기 화산재와 해양퇴적물이 함께 쌓여 만들어진 층이다. 맨 위 거죽이 약 55만년 전 화산활동이 육상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층,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름과 같은 용암층이다.
천지연폭포 앞 해변에서는 서귀포층의 일부가 솟아올라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유일하게 猾浩?수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약 40m 높이로 지층이 노출돼 있는데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퇴적암이 뒤섞여 있다. 수십만년 격렬한 화산활동과 침식의 세월이 동시에 계속됐다는 뜻이다. 가까이 가서 봐야 한다. 놀랍게도 이 층에서 숱한 조개류와 산호, 성게 등의 화석이 발견된다. 화석은 거의 해양쓰레기만큼이나 흔하다. 용암으로 바다가 끓어오르던 시절에도 이 섬 주변에 생명이 번성했다는 증거다. 서귀포층은 물을 잘 투과시키지 않기 때문에 지하수가 이 층을 바닥 삼아 고였다. 석기 시대부터 제주도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서귀포층의 존재 덕이다.
이밖에 지질 명소로 지정된 곳은 한라산, 만장굴, 성산 일출봉, 천지연폭포,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 산방산 등이다. 대부분 유명한 곳이니 설명은 생략한다. 최근에 선흘리 곶자왈이 추가됐다. 하나하나를 간략히 설명한 자료만 모아도 제주도라는 지질학 교과서의 페이지는 무척 두꺼워진다. 이상 10개 외에도 이 교과서의 챕터는 무궁무진하다. 제주라는 화산섬을 걷다 마주치는 풍경이 사실 모두 지질학 교재다. 그것도 유네스코가 검증한, 믿을 수 있는 교과서다. 그러니 이 섬으로 야외학습을 떠날 땐, 책가방 속엔 다른 책 대신 지도와 나침반과 마실 물을 넣을 것. 신발 아래 밟히는 느낌이 어딘지 거칠고 기운찬 데가 있다면, 아직 혈기가 왕성한 지구의 맥박을 느꼈다고 해도 좋다.
[여행수첩]
●수월봉은 제주올레 12코스가 지나는 한경면 고산리에 있다. 최대 규모의 응회환 지형은 수월봉 고산기상대 절벽 아래에 있다. 해안도로 따라 신도리 방향으로 가다 해변 진입로로 내려가 다시 고산리 쪽으로 가야 한다. 한경면 주민센터 (064)728-7911 ●용머리해안 입구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하멜상선전시관 앞에 있다. 오전9시~오후6시 썰물 때 개방. 방문 전 전화확인 필수. 입장료 2,000원. (064)794-2940 ●지질공원 명소마다 해설사가 있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제주 관광 안내전화 (064)120 제주관광공사 (064)740-6000
제주=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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