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주년 독일 극작가 뷔히너민중혁명 도피자금 마련 위해 쓴 희곡, 프랑스혁명 후 핏빛 환멸 그려"이자람 '사천가'에 감명받아 캐스팅… 혼자서 군중·이야기 전하는 광대 역할""판소리는 안하지만 운율 살려 작창… 동료 배우들이 판소리가 들린다고 해"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혁명과도 같은 삶을 살다 갔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었던 그는 프랑스 혁명에 매료된 나머지 독일 민중혁명을 꿈꾸다 스물넷에 객사했다. 짧은 인생을 반체제운동으로 태워버린 그는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1835년 집필한 희곡 '당통의 죽음(Danton's Death)' 속 인물들의 삶과 닮아 있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선 이들이 그야말로 천지개벽과 같았던 프랑스 혁명의 후폭풍 속에서 민심을 얻어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두대 아래 목을 내놓았듯, 뷔히너 또한 그토록 애원했던 혁명의 끝을 보지 못하고 생을 역사 앞에 바쳤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뷔히너의 대표작 '당통의 죽음'이 루마니아 태생의 세계적인 연출가 가보 톰파에 의해 내달 3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1987년 김철리 연출가가 극단 '현대극장'과 함께 공연한 후 무려 26년 만에 국내 연극 팬들 앞에 서는 이번 '당통'은 소리꾼 이자람과 함께이다. 이자람의 판소리극 '억척가'와 '사천가'에 감명받은 톰파가 지난해 8월 예술의전당으로부터 '당통의 죽음'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자마자 이자람의 캐스팅과 작창을 원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우리 판소리꾼의 만남. '당통의 죽음'을 국내 무대에 올림으로 뷔히너 4대작(렌츠,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레옹세와 레나)을 모두 공연하게 된 톰파는 어떤 속내로 이런 조합을 빚어냈을까. 지난주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만난 가보 톰파와 이자람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1794년. 혁명 후 5년이 지난 파리의 거리는 혁명세력들 간 갈등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공화정은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에 휩싸인 로베스피에르(윤상화)와 단두대를 앞세운 공포정치에 회의를 느낀 당통(박지일)의 충돌. 이 모든 스토리를 객석으로 전하는 화자 겸 거리의 광대가 이자람의 역할이다.
"자람은 군중이다. 100명에 달하는 원작의 등장인물을 오직 배우 14명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람 때문이다. 거대한 혁명 속에 잠겨있는 개인의 감정들을 모아서 표현하는, 집단의식을 형상화한 인물이 자람이다." 이자람은 톰파의 말처럼 혼자 군중을 연기한다. 다자 연기와 소리에 능한 이자람의 특기가 남김없이 발휘된다. 1막에서 이자람은 귀족을 죽이라고 부르짖는 시민이 되고, 목숨을 지키려 몸을 파는 어머니가 되기도 하며 이 어미를 죽이려 하는 아비가 된다. 2막에선 당통을 추앙하다 순식간에 로베스피에르로 돌아서는 시민집단을 표현한다. "모두를 내려다보고 이야기를 전하는 자람은 이른바 '역사의 천사'를 연기한다고 볼 수 있다. 유머와 아이러니를 품은 이자람은 모자이크 조각처럼 끊어져 있는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서사자를 담당한다."
이자람의 캐스팅과 작창은 어쨌든 극에 있어 판소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클 것이란 예상을 끌어낸다. 이에 대해 이자람의 답은 의외다. "내가 나오면 당연히 판소리를 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당통의 죽음'에 판소리는 없다. 새로운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양 연극 속에서 갑자기 판소리가 들려온다면 이상하다. 이 연극에 (내 역할이)어떻게 하면 잘 섞여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아, 판소리가 답이 아니구나'였다. 성법(聲法)은 치우고 대신 판소리를 끌어가는 아주 강한 힘인 말의 운율을 살리는 데 집중해 작창을 하기로 했다. 이 작업을 위해 연출과 수없이 화상채팅을 했다." 인터뷰 후 진행된 런쓰루(전막을 진행하는 공식연습)에서 들은 이자람의 소리는 그의 말대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판소리가 떠오른다. "판소리는 하지 않지만 판소리를 하는 배우만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이라 생각한다. 동료 배우들도 판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이자람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연극이지만 '당통의 죽음'은 두말할 것 없이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터라 복잡한 배역 이름, 난해한 역사적 사실들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감을 키운다. 자칫 무대와 객석이 만나기도 전에 재미라는 녀석이 지쳐 자빠질지 모른다. 이런 우려에 대해 연출가 톰파는 "역사적 이벤트만을 다루는 극이 아니다"고 답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뷔히너는 이 연극에서 사건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이고 실망스러운 묘사가 가득하다. 개개인이 갖는 배신감, 허영, 사랑, 외로움 등 감정뿐 아니라 혁명에서 부산물로 남겨지는 정치적인 조작, 인간의 약점, 도덕성의 결여 등에 주목한다. 거대한 혁명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게 아닌, 피가 철철 흐르고 매서운 현장과 심리를 보여준다."
가보 톰파에게 이번 공연은 일종의 모험이다. 자신의 첫 '당통'을 원작자는 물론 본인의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공연하는 게 이만저만한 어려움이 아닐 것이다. "뷔히너는 가히 두 번째 셰익스피어라고 할 만하다. 혁명적인 극언어를 사용하는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아 극을 만드는 셰익스피어와 다르다. 이 같은 의미를 한국 관객이 알아줄 거라 본다. 독창적인 작품은 리스크가 높을 때 나온다. 실패는 두렵지 않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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