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자 이 칼럼의 제목은 '가상소설, 함부로 쓰지 마라'였습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을 빌미로, 그의 내연녀라는 여인과 아들이 말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논객이 각각 쓴 가상의 글을 질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한 신문사 논설위원의 '채동욱 아버지 전상서'는 같은 신문사의 논설위원이 그런 '뻘글'을 쓰지 말라고 비판할 정도였다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 칼럼에는 결정적 잘못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같은 회사 논설위원이 '뻘글' 운운하며 조롱한 것처럼 쓴 글도 다른 사람의 창작물이었습니다. 인물 사진까지 곁들인 글의 말미에 그 논설위원의 생각과 입장과 관계없이 쓴 창작물이라고 표시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실로 받아들여 인용했던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가짜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비판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속아 넘어갔습니다.
글이 나간 다음 속 시원하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있었고, 해당 신문사에 대해 누적된 반감을 드러내는 메일도 왔습니다. 물론 '니나 잘해' 식의 막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모처럼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기분에 빠져 있었고, 사흘이 지나서야 잘못을 알게 됐습니다.
왜 이런 잘못을 저질렀을까. 곰곰이 자문한 끝에 그 글을 쓸 무렵 내가 일종의 승리감에 취해 있었던 걸 알게 됐습니다.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 두 가지가 윤동주(1917~1945)의 시인 것처럼 알려진 과정을 취재해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에 세 번 쓴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 건'을 한 처지에서 새로 '질타할 거리'를 만나 냉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윤동주의 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의 시로 알려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은 월간 편집인 정용철 시인이 이 잡지 1995년 9월호에 '9월의 내 모습'이라는 제목 아래 무기명으로 쓴 정기 칼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목을 바꾸고 일곱 가지 질문 중 두 가지를 뺀 채 윤동주의 시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편지'입니다. 작곡자 고승하 씨는 고교 음악교사이던 1984년 문구점에서 파는 노트의 표지에 윤동주의 글이라고 인쇄돼 있어 당연히 그런 줄 알고 곡을 붙였습니다. 그 뒤 가수 안치환에게 부르게 해 '윤동주 작사 고승하 작곡'의 이 노래는 안치환의 앨범에까지 수록됐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윤동주기념사업회가 창설한 '윤동주 시 작곡 경연대회'에서 이 가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금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문학혼을 기리기 위해 창설한 대회에서 누구 글인지도 모르는 작품이 최고작으로 뽑힌 것입니다. 가사에 덜 신경을 쓰는 작곡가들 위주로 심사를 한 탓입니다. 잘못을 지적한 내 글이 나간 이후 사업회는 개선방안을 마련했고, 해당 작곡자는 용기 있게 스스로 상을 반납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처음 지적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잘못을 밝혀내고 글로 알려 바로잡기까지 했으니 나는 분명 한 건을 한 셈입니다. 왜곡과 조작의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사실은 본의 아닌 불명예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을 취재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글을 쓰면서 잘못을 전파하고 퍼 날랐으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무분별한 장난이나 악의 섞인 가상의 글, 패러디는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런 것이 없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읽는 사람들이 더 주의해서 읽고 사려와 분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일로 그런 점을 더 깊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난번엔 같은 언론인 때문에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나 자신 때문에 부끄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이번 글은 칼럼이라기보다 반성문입니다.
임철순 논설고문 yc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