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들은 단지 상상의 소산일 수만은 없다. 겪지 않고 쓰는 것은 거짓이라는 듯, 작가의 삶의 이력과 강하게 밀착돼 있는 소설들이 있고, 그런 소설들은 대개 서사의 온도가 높다. 작가 송기원(66)이 이후 10년 만에 펴낸 새 소설집 (실천문학사 발행)도 그런 작품들 중 하나다.
치열해서 고단했던 삶의 갈피들을 망라한 이번 소설집은 7편의 자전적 구도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민중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던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시작으로 갖가지 필화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이후 홀연히 떠나 인도와 히말라야를 헤맸다. 불교에 심취해 계를 받은 후 6개월간 탁발을 하기도 하고, 홀로 토굴에 들어가 1년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수행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가 '구도의 여로'라 이름할 만한 방향으로 전환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은 구도라는 것이 상승의 직선이 아니라 순환의 원형 형태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집이다. 굳이 '환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구도의 완성이 이뤄지는 곳은 깊은 산사나 토굴이 아니라 민중적 삶의 한복판임을 작가는 서사 그 자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동백섬'의 주인공 '나'는 늦은 밤 광화문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나이 마흔에 이르러, 지나온 삶은 물론이려니와 앞으로 살아낼 삶마저도 애오라지 추악함만으로 가득하게만 여겨져" 돌연 서울역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곳 저곳을 보름간 헤매고 다니던 출분(出奔)의 마지막 여정은 여객선을 타고 들어간 동백섬 부근. 이곳이야말로 죽을 자리로는 그만이라고 여겨진 까닭이다.
하지만 포장마차에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의 중년 여인 세 명을 만나면서 죽음의 욕망은 동백꽃처럼 강렬한 전복의 계기를 맞는다. 여인들은 "이 아자씨 봉께 헹펜이 쬐깜 에로운 모냥인디" 해가며 질펀하게 '나'를 희롱하고, '나'는 그녀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들이키며 "그녀들의 신명에는 그녀들이 지금 혼신으로 맞서고 있는 삶의 어떤 피투성이 싸움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고 짐작한다.
술에 취한 여인들은 "흉한 꼴 보여 미안하다"고 말하고, 역시 취한 '나'는 "흉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댁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저기 동백섬에 동백꽃보다도 댁들이 훨씬 아름다워요"라고 답한다. 이 말에 서울서 온갖 사내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하는 여인이 울음을 쏟는다. "고향에 와서 이르코롬 한 번씩 울고 나야, 그동안에 막?던 숨통이 터지고 심이 난단 말이요" 이들은 "모두 함께 죽읍시다"를 외치며 매달 보름이면 바닷물이 빠져 물길이 활짝 열리는 동백섬으로 걸어간다.
소설집에 실린 세 편의 연작소설 '무문관' '탁발' '객사'는 작가가 몸소 겪은 구도의 체험을 반영한 소설들이다. 진과 속을 넘나들며 온 몸으로 수행하던 '땡중' 석전이 삶의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 진리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버스정류장에서 얼어 죽은 걸인의 웃는 표정에서였다. "무문관 삼년 동안 나는 부처를 얻은 대신에 사람을 잃어버렸던 거야. 나는 결국 삼 년 동안 사람을 잡아먹고 부처라는 괴물이 되어 세상에 나온 거야."('객사')
투옥과 어머니의 자살, 고통스런 출분과 수행의 반복으로 이뤄진 표제작 '별밭공원'은 소설로 쓴 작가의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16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훌쩍 가면 집사람이 '이런 식으로 갔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내 생을 최종적으로 정리해본 작품"이라고 말했다. 소설 곳곳에서 인물들은 뜨거운 눈물을 터뜨린다. 구도의 공간은 산사와 토굴, 인도와 히말라야로 제각각이었지만, 작가에게는 삶과 죽음 모두에 맞서 싸워야 했던 피투성이 전장이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동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풍진 세상 속으로 돌아옴으로써 그 싸움은 마침내 끝난 듯하다.
글ㆍ사진=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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