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 한국일보를 상대로 허위보도에 따른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 소장이 접수됐다. 법조 기자들이 비리 의혹 등을 주로 다루다 보니 사건 당사자들에게 소송을 당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간혹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덮어놓고 소장부터 들이밀고 보는 억지 소송도 있어 웃어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송 당사자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황 장관이 문제 삼은 기사(본보 10월 4일자 1ㆍ2면)는 그가 부장검사 시절 모 재벌그룹에 근무하던 K변호사로부터 1,5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받은 의혹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금품 제공자의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 등을 근거로 의혹을 제기하되 "받은 적 없다"는 황 장관의 해명까지 충실히 담았다. 한마디로 '합리적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비리 의혹을 다룬 기사였다.
1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장을 들춰보며 좌절했다. 법도, 언론의 역할도 모르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억지라면 웃어 넘기겠지만, 법무부 수장이 법을 앞세워 부리는 억지에선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상식을 권력 앞에 무릎 꿇리겠다는 선전포고로 들렸기 때문이다.
황 장관은 소장에서 사실관계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K변호사가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500만원이 아니라 600만~700만원이었던 것 같다"는 취지로 말한 것을, "금품 자체를 전달한 적이 없다"는 말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K씨가 한국일보의 첫 보도 이후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금품을 전달한 장소, 함께 있었던 제3의 인물, 나중에 다른 검사를 통해 확인한 내용까지 줄줄이 밝혔는데도, 소장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황 장관은 1억원의 배상금과 함께 기사를 삭제하지 않을 경우 기사 1건당 하루 10만원씩을 달라는 신청도 법원에 냈다. 소장을 읽는 내내 피의자에게 허위 자백을 강요하는 독재시대 공안검사의 얼굴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금품 제공자의 일관된 진술이 있는데, 황 장관 요구대로 "사실무근"이라고 보도하면 오히려 오보가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황 장관이 모함을 당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직 장관의 비위 의혹을 접하고도 보도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것이다. 법을 공부하고 집행해 온 황 장관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황 장관의 무리한 대응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17일 예정된 법무부 국정감사를 앞두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조치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야당은 국감에서 이 문제를 집중 거론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눈앞의 위기를 피하려는 찍어 누르기 식 대응은 검찰과 법무부 조직, 그리고 민심을 거슬러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권력은 유지할 수 있을지언정 존경과 권위는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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