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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10월 15일] 겸손이 미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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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10월 15일] 겸손이 미덕인가요?

입력
2013.10.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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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초청을 받아 내한한 일본 연극계의 거장 스즈키 다다시(74)를 지난주 초 대학로에서 만났다. 공연을 앞둔 한일 합작 연극 '리어왕' 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갑자기 "지금부터 하는 말은 꼭 기사에 실어달라"며 화제를 바꿨고 이어 한국 예술계를 향해 '아픈 말'을 쏟아냈다.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인터뷰(9일자 19면)에는 지면 사정상, 그리고 스즈키씨의 지적이 기사 주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이 말을 담지 못했다. 하지만 스즈키씨와 헤어진 후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외국 연극인들로부터 스즈키씨가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말을 거듭 듣고서야 이렇게 칼럼을 통해서라도 노(老) 연출가가 전한 지적들을 짚어보고 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스즈키씨는 "서울에서 공연페스티벌을 열면서 어째서 매번 유럽 작품으로 개ㆍ폐막작을 선정해야 했느냐"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자는 "국내 연극팬들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접할 기회이기도 하다"며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내놨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나라 예술가들, 그리고 관객 모두가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국가들의 공연예술이 한국의 그것보다 '당연히' 뛰어나다는, 일종의 문화사대주의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정곡을 찔렀다. 그는 "한국의 공연수준도 세계적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겸손만 떨어야 하느냐"며 "외국 문화계에선 계속해서 한국 문화에 대해 높은 관심과 평가를 보이고 있다"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스즈키씨는 함께 일하는 한국 배우들의 실력에 대해 "당장 브로드웨이 공연 주연급으로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며 "이들이 만드는 공연이 유럽과 미국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같은 날 저녁, 서울 합동 프랑스 대사관저에선 서울아트마켓에 초청받은 유럽의 유력 예술단체 대표 및 감독들이 대거 참여한 대사 주최 만찬이 열렸다. 이들은 2015년 한 해 동안 진행될 '한국-프랑스 문화 커넥션'행사를 앞두고 국내 공연 가운데 자국 무대에 올릴 만한 것들을 발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우연히 이 만찬에 참석한 기자는 몇몇 연출가와 극장 기획자들로부터 이날 오전 스즈키씨가 했던 지적을 뒷받침하는 말들을 들었다.

내달 게오르크 뷔히너의 연극 '당통의 죽음'을 국내 무대에 올리는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가보 톰파도 이날 한 손엔 음식을 가득 담은 접시를 든 채 한국의 소리, 특히 창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에 소리꾼 이자람을 광대 역할로 무대에 세우는 톰파씨는 "이자람의 '억척가'에 이어 '사천가'도 내가 주관하는 연극제에 초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에게 쉽지 않은 '억척가'라는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는 정성도 보였다. 펜틸라 자르모 파리 샤이오 국립극장 예술자문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의 현악기 공연들에 관심이 높다"고 밝혔고, 많은 프로듀서들이 한 퓨전 국악밴드의 공연에 매료되었다며 공연 유치 계약을 문의하기도 했다.

이들의 말처럼 우리 공연 예술의 수준은, 우리가 스스로 낮춰 평가해온 것일 뿐, 사실은 이미 세계적인 극단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이들의 반응이 작은 목소리가 아니라면 그동안 산업적인 마인드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소극적으로 해외시장을 바라본 정부와 공연계의 '갑'들은 생각을 고쳐야 한다. 외국의 유명 도서관 '한국 음악'코너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방치된 불과 몇 장의 철 지난 시디(CD)들이 우리 문화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야 한다. 세계 무대에 우뚝 선 예술인이 싸이와 소녀시대 뿐은 아니다. 우리의 공연 예술 실력에 대한 지나친 겸손이 자칫 국내 소비자에게 문화사대주의를 주입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예술페스티벌엔 우리 공연이 개막작으로 당연히 무대에 오르고, 관객들은 앞다퉈 지갑을 여는 날을 가까운 미래에 기대해 본다.

양홍주 문화부 차장대우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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