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해 왔던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 한 가지가 있다. 여야 정당 간에 '역지사지' 하는 정신이 부족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투구에 가까운 정쟁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대의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는 하나의 게임이다. 여당과 야당이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주고받는 1인 2역의 단막극 같은 것이 정치이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선거라는 공식적인 정치과정을 통해 정치권력의 향배가 결정된다. 일단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면 패자는 승자에게 깨끗이 승복하고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베풀고 포용한다.
이런 규칙이 잘 지켜지고 그래서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성숙해 갈수록 여당과 야당은 선거경쟁의 열쇠를 쥔 중간투표자(median voter)를 지지자로 돌려세우기 위해 온건한 정책 성향을 보이게 된다. 대의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국가일수록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간의 이념적 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 이유다. 여야 간에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권력교체는 그래서 여당과 야당이 얻게 된 편익의 합이 '0'인 제로섬(zero-sum)의 게임이 아니라 '0'보다 큰 양의 넌제로섬(non-zero-sum) 게임인 것이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들어선 이른바 '87년 체제'는 우리 정치에도 이런 종류의 '게임의 규칙'이 지켜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후 20년 넘는 세월을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그 '게임의 규칙'을 지키고 다듬어 왔다. 1998년과 2008년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때에도 크고 작은 불협화음이야 있었지만 큰 틀에서 우리 정치는 그 '게임의 규칙'을 온전히 지키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그런 '게임의 규칙'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진보진영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지 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10년'의 잘잘못을 따지며 역사의 무덤을 뒤져 다시 참수할 시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고 넘길 수 있는 '부관참시'의 나쁜 버릇도 이쯤 되면 병적인 집착으로 해석될 여지마저 없지 않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게임의 규칙'을 흔들려는 것일까? 그 속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 정부의 이런 행동들이 그간 우리 정치가 힘들게 지켜온 '게임의 규칙'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사실이다. 야당의 입장에서 '국정원 선거개입' 등 '관건 선거'의 의혹 속에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대통령 선거를 내주고도 승복한 것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려 했던 패자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리라. 야당인들 간발의 차로 놓쳐버린 선거가 왜 아깝지 않았을까. 그런 욕심을 내려놓고 패배를 인정한 것은 민주주의 정당이라면 지켜야 할 '게임의 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부와 국회를 동시에 장악한 지금의 여당과 정부는 그런 야당을 포용하고 껴안기보다 사사건건 무시하고 내치는 모습만 줄곧 보여주고 있다. 일단락 된 듯 했던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사초논쟁을 벌여가며 되살려 냈다. 반면 '게임의 규칙'을 문란하게 만든 주범들을 다스려 달라는 야당의 요구는 묵살하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민생정치'는 여야 정쟁 때 정부 여당의 단골 구호인데 지금은 야당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 정작 민생을 앞세워야 할 정부 여당이 민생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있는 형국이다. 처지가 바뀌어도 한참은 바뀐 듯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해 쓰러져가는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면서 이념을 앞세우는 야당에 대해 민생정치의 중요성을 수도 없이 강조해 왔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는 없다.
이제 정부여당이 '게임의 규칙'에 따라 아량과 관용으로 야당을 포용할 차례다. 야당이 과거 집권기에 행했던 크고 작은 실언과 실수들을 가볍게 보아 넘기는 '통 큰 정치'의 한 수를 보여줄 때다. 그래서 이념적 선명성을 앞세우는 야당에 대해 여당은 민생정치 복귀를 외치는, 예의 그 '게임의 규칙'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차재권 동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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