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수십 년간의 압축성장으로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반면, 이 과정에서 생긴 사회ㆍ경제적 양극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온 때문이다. 경제 좌표에서도 이런 점은 확연하다. 지난해 우리의 복지예산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심각해지는 노인복지에서는 유엔인구기금 조사결과 남아공이나 우크라이나보다도 나빴다. 소득안정성은 91개 조사대상국 중 90위다. 교역규모 세계 10위권을 자랑하고, 이제 선진국 턱밑까지 왔다는 경제수준과 비교하면 창피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돈이다. 지속 가능이 생명인 복지가 정착하려면 재정확보가 전제임은 물론이다. 눈 앞의 정략에 빠져 빚을 내거나 후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것은 도박 빚을 끌어다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남미가 그랬다. 그런 점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은 증세다. 수혜자인 국민이 재원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그래야만 소득재분배와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수단도 얻을 수 있다. 이 점 역시 우리 조세 수준을 보면 분명하다. 소득세율은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고, 법인세가 높다고 하나 세액공제 등을 감안한 실효세율은 훨씬 낮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OECD, 세계은행(WB) 등이 우리 당국에 권고하는 것도 이것이다. 소득 양극화가 한국 사회의 최대 불안 요인인 만큼 증세를 통해 적극적으로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세를 반대하거나 미룰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의식은 증세를 수용할 단계에 와 있지 못하다. 지난번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중산층의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여론의 거센 반발에 좌초한 게 단적인 예다. 복지는 필요하지만 돈은 못 내겠다는 이율배반적 심리다. 야당이나 시민단체에서 제시하는 부자증세, 법인세 인상은 이런 국민정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민주당은 부자증세로 50조원, 법인세 인상으로 25조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법인세 인상이 경기에 미칠 영향이나 부자증세가 얼마나 현실적인 도움이 될 지 생각하면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중산층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려면 먼저 돈 많은 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복지논쟁이 촉발된 이후 연일 터져 나오는 복지행정의 난맥상, 재원 누수, 비리와 탈법은 이런 점에서 시사점을 던진다. 전국 수천 개의 노인복지시설에서 국가지원금을 착복하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고, 기초노령연금 부정 수급자는 매년 수만 건에 달한다. 돈이 없어서 공약에서 대폭 후퇴한 4대 중증질환 지원에서 소득 상위 30%가 수혜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아파트 경비로 생계를 잇는 노인이 혜택에서 제외된 기초연금을 타워팰리스에 사는 노인이 받아가는 게 우리 복지행정의 현실이다. 무상보육의 실수요를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지원해 연간 1조원이 넘는 보육예산을 낭비하는 제도상의 허점까지 포함하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이는 복지예산이 얼마나 될까 회의감이 들 정도다. 복지의 천국이라는 북유럽 국가들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하지는 않는다.
2010년 우리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회원국 중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그 전해는 네 번째여서 갈등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이런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손실이 연간 82조~246조원이다.
정부와 여당이 135조원의 복지재원 중 지하경제 양성화(27조원)와 비과세ㆍ감면 혜택 축소(18조원), 금융과세 등으로 51조원을 확보하고, 나머지 84조원은 재정지출을 줄여서 조달하겠다고 했다. 실현 가능한 것인지 숫자놀음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증세가 안 된다면 헤픈 씀씀이를 꽉 조이고, 조세의 법망을 비웃는 탈세를 척결하는 것이 순서다. '그렇게 한들 얼마나 걷히겠느냐'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증세와 보편적 복지 이전에 중산층의 박탈감과 위화감을 돌보는 게 먼저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