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피우고 석기를 사용하고 땅에 씨앗을 뿌리면서 인류는 기나긴 선사시대를 거쳐 진화해왔다' 이것이 우리가 고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인류의 역사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은 혁신적 행동을 통해 옷을 하나씩 입듯 인간성을 갖춰 나간다. 그러나 과연 이 분석은 타당할까.
구석기 고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클라이브 갬블이 새 책 으로 고고학계의 대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고고학의 기원과 혁명 개념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변화는 계단을 오르듯이 단절적으로 일어난다. 혁신적 기질을 타고난 누군가가 처음 도구를 쓰기 시작했고 이후 모든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이는 '혁명'이란 단어로 명명돼야 마땅할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갬블은 고고학자들이 그리는 이 같은 변화의 궤적을 "우리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폄하한다. 인류의 변화를 혁명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기술의 효율성이나 자연에 대한 통제력의 증가 같은 기준에 따른 것으로, 현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성, 즉 휴머니티의 형성 과정을 파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기 이전의 인간에게는 인간성이 전혀 없었는가"라고 갬블은 반문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성의 규모가 자라가는 양상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계단이 아닌 경사진 언덕 모형이 적당하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혁신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익숙해지는 존재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 및 사물들과 일련의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성은 자연스럽게 발달된다. 지배자의 모습보다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 가깝다.
갬블의 주장은 고고학계 전반이 의지하는 전제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언뜻 급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성을 더해가는 모습을 어린이의 성장 과정에 비유한 그의 이론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먼 옛날의 인간이 지금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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