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많은 감독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197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를 떠올리게 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어요."(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1994년 한창 영화 공부할 때 '펄프 픽션'을 보고 친구들과 함께 충격에 빠졌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스토리였거든요."(봉준호 감독)
할리우드와 충무로를 각각 대표하는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와 봉준호가 1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앞 광장에서 만났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행사 '타란티노가 봉준호를 만났을 때'를 위해서였다.
여느 감독들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부를 재능을 지닌 감독들이면서도 둘은 이날 가진 공개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칭찬과 호기심 어린 질문과 재치어린 답변을 이어갔다.
둘의 만남은 타란티노 감독이 봉 감독과의 대면을 위해 9일 갑작스레 부산영화제를 찾으면서 속성으로 이뤄졌다. 타란티노 감독은 중국 대중이미지상 시상식 참여를 위해 마카오를 들렀다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제 친구가 '설국열차'의 캐스팅 디렉터였는데 봉 감독을 만나게 해준다고 해 충동적으로 부산에 오게 됐다"고 밝혔다. 타란티노 감독은 "봉 감독의 작품에는 공포스러우면서도 코믹한 스필버그의 영화들과 비슷한 유머가 있다"며 "'살인의 추억'은 걸작"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봉 감독의 화답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펄프픽션'의 존 트라볼타 등 타란티노 감독은 한동안 관객으로부터 멀어진 배우를 스크린에 불러내 큰 효과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고 말했다. 그는 "TV 활동만 하시던 변희봉 선생님을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에) 캐스팅하며 폭발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다 타란티노 감독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도 했다.
두 감독은 장르적 규칙을 자신들의 영화 속에 끌어들이면서도 이를 비틀어 낯선 즐거움을 줘온 공통점을 지녔다. 봉 감독은 "저는 70년대 미국 장르영화를 무척 좋아한다"면서도 "장르적 규칙이 한국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망가질 때 쾌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과학자와 군인이 괴물과 맞서는 일반적인 미국 영화와 달리 제 영화 '괴물'에선 바보 같은 가족들이 힘겹게 싸우는데 그렇게 해서 이상한 느낌의 새 장르가 나오는 듯하다"고도 말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괴물'에선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가 진정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고 응수했다. 이에 봉 감독은 "형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정말 이상하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공식적인 첫 만남을 이날 가졌지만 이미 함께 영화를 관람하며 우정을 쌓았다. 두 감독은 10일 오후 홍콩 고전 무협영화 '외팔이'를 보며 영화제를 자유롭게 즐겼다. 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이 영화를 보며 박수를 치고 크게 웃어 다른 관객들이 '도대체 누구길래'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타란티노 감독은 "부산에 와서 영화제 상영작 목록에 '외팔이'가 있는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며 "늘 만나고 싶었던 봉 감독과 이틀 동안 시간을 보내 즐거웠다"고 말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화광으로 소문난 타란티노 감독은 11일에도 부산영화제 상영장에 갑작스레 '출몰'해 관계자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날 반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이스라엘 공포영화 '늑대들'을 보며 수시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시간을 진행한 김영우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관객들조차 타란티노 감독인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호기심에 찬 그가 진지한 질문들을 던져 예정시간 보다 행사가 늦게 끝났다"고 말했다. 김 프로그래머는 "타란티노 감독이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해 이스라엘 감독이 혼이 빠졌다"고도 전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9일 부산에 도착한 뒤 영화제 관계자의 안내를 받지 않고 영화제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배지를 스스로 찾아 진행요원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부산=강성명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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