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산책/10월 12일] 두 겹의 기획- 삶과 이야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산책/10월 12일] 두 겹의 기획- 삶과 이야기

입력
2013.10.11 10:53
0 0

출판 기념회에 들렀다가 군무(群舞)를 춘 적이 있다. 흰 벽엔 영화의 한 대목이 반복해서 나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가 깔끔한 젊은이에게 바닷가에서 춤을 가르쳤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듯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이다. 그 영화의 제목은 '그리스인 조르바'였고, 조르바 역의 안소니 퀸은 광산 사업에 실패한 후에도 눈물을 쏟거나 절망하지 않고 한 판 멋진 실패자의 춤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 이 크레타 격언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또 다른 작품 프롤로그에 등장한다. 몇 년 전 어느 시인은 내게 시집을 건네며 첫머리에 이런 격려의 말을 적어주기도 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더 낫게 실패하라.'

기획의 시대가 온 탓일까. 기획 관련 전문서 발간에 강연과 워크숍이 부쩍 늘었다. 설명의 대부분은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로 채워지고,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려면 알아야 할 원칙과 반드시 성공하려면 외워야 할 법칙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내겐 성패의 파노라마보다 '두 겹의 기획'이 더 소중하다.

먼저 우리는 일터에서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획을 한다. 결과는 정해진 틀 안에서 곧 나온다. 성공엔 그 만큼의 보상이 따르고 실패엔 그 만큼의 질책이 쏟아진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기 위해 절치부심 다시 도전한다. 그리고 아쉽게 실패하거나 멋지게 성공한다. 슬픔과 기쁨은 잠시 뿐이다. 이튿날 출근하면 새로운 기획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나 역시 등단 직후엔 그랬다. 내가 쓰는 장편소설의 성패에 예민했으며, 결과가 나온 후엔 그 다음 장편소설로 곧장 달려가서 또 어떤 승부를 보려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에 몰두할 때, 어느 영화인으로부터 짧은 충고를 들었다. "소비되지 마시길!"

창작, 그러니까 생산에 매진한다고 자부한 나로선 충격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작품에만 집중하고 내 인생엔 무심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무턱대고 만드는 동안 인생은 소비되고 있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또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남은 나날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새로운 물음이 얼음송곳으로 날아들었다.

그 후로도 어떤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고 어떤 작품은 실패했다. 그러나 각각의 성공과 실패는 절대적인 가치를 띄지 않고 인생이라는 또 다른 기획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비되지 않는 방법도 두 가지 찾았다. 하나는 평생 즐길 이야기를 골라 읽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트렌드란 곧 삶의 본질이기에 인간이란 생명체의 보편적 고민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기획은 맞견주어 높낮이를 따질 수 없는 오롯이 나만의 일상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이보다 멋진 소설가의 자서전 제목은 드물리라. 그런데 출간된 책은 마르케스의 삶 전체를 포괄하지 않았고 소설가로 입문한 청년기까지만 다룬 1부다. 작가는 전성기와 완숙기 역시 풍부하게 이야기로 옮길 준비를 마쳤지만, 안타깝게도 병이 깊어 더 이상 기억을 풀어나가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에 기대어 예정된 미완을 설명하고 싶다. 카잔차키스는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만의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고. 그 역시 '크레타의 경지(境地)'라고 부른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평생을 오르고 또 올랐노라고. 뜻밖에 찾아든 병마와 갑작스런 죽음은 이 '오름'에 포함된 가장 어두운 조건들일 뿐이다. 마르케스도 까뮈도 카잔차키스도 이 길로 용맹 정진했다. 작품이라는 붉은 발자국이 멈춘 자리, 내딛지 못한 비탈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자. 그리고 기억하자. 고통을 견디며 미완을 예감하면서도 오름을 멈추지 않은 한 인간의 긍지를.

그리하여 우리의 조르바는 신에게 이렇게 외치듯 춤추었다.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김탁환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