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7~10일 참석한 아시아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아세안 관련 다자회의에서는 한반도 주변국 외교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났다. 한국과 일본의 정상은 냉랭한 장면을 수 차례 연출하며 꼬일 대로 꼬인 양국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줬고, 미국과 중국은 서구 잣대를 중국에 적용하는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며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박 대통령은 10일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자신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한 역내 각국의 지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 구상을 실현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일본과는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회의 기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잇따라 만나며 중국과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고 여러 국가의 정상과도 양자회담을 가졌지만 유독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만 외면했다. 박 대통령이 다자회담에서 아베 총리를 냉대한 건 지난달 러시아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이어 두 번째다.
아베 총리는 아세안 방문 기간 중 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공개적으로 희망했지만 일정 마지막 날인 10일에도 한일정상회담은 불발됐다. 이와 함께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릴 때마다 별도로 열렸던 한중일 3국 정상회담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 무산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아세안+3 정상회의에 앞서 단체 기념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포즈를 취하기 위해 옆에 서있던 아베 총리와 손을 잡긴 했지만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어 열린 회의에서도 싸늘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 리커창 총리가 나란히 앉았으나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가뜩이나 과거사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올해 마지막 다자 정상회의마저 막을 내리면서 연내 한일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한편 이번 회의기간인 9일 별도 회담을 가진 리커창 중국 총리와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치열한 기싸움을 벌였다. 리 총리는 미 정부의 채무한도 조정문제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전달하며 "중국 첨단기술 제품의 수출제한을 완화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 총리는 특히 "중국은 아직 발전한 국가가 아니다"면서 "서구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케리 장관은 "중국의 발달 수준은 리 총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으며 모두가 세계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중국의 위상이 급속히 향상된 만큼 국제규범에 맞는 역할을 담당하라는 의미다.
앞서 6월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양국의 미래비전으로 '신형대국관계'를 제안하며 대결이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 신뢰형성을 강조했다. 이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적극 호응하며 새로운 유형의 관계구축을 약속했지만 불과 넉달 만에 잡음이 불거진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리 총리와 케리 장관은 전략적 소통 강화와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처럼 양국이 인식의 차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향후 주요 현안을 놓고 미중간 갈등이 고조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다르스리브가완(브루나이)=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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