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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10월 10일] 무력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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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10월 10일] 무력한 말

입력
2013.10.0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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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마다 돌아오는 지면의 소재를 취하기 위해 시사 이슈를 일별한다. 3주전 당시 모든 이슈를 빨아먹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RO'회합 사건을 둘러싼 논점들을 일별한 글을 쓴 이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한 신문사가 작정하고 터트린 혼외자식 추문에 휘말린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감찰에 물러났고, 용산참사의 책임자에 해당했던 경찰 간부는 공항공사의 사장이 되었다.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은 직접 자사 9시 뉴스를 진행하기 시작해 화제가 되었고 차세대전투기 사업은 F-15SE가 탈락하면서 일단 중지되었다. 지리멸렬한 국회가 지겨워진 새누리당은 잠시 국회선진화법이 위헌이라 주장하기도 했고, 기초노령연금 공약이 후퇴했다는 논란이 시작되어 한바탕 대선복지공약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 급기야 복지부 장관이 '항명' 파동을 일으키며 사퇴하는 시점에 사퇴한 검찰총장은 여전히 한 신문사와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이후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이 시작되자 TV조선은 그 투쟁에 통합진보당이 끼어 있다는 이유로 김광일 논설위원을 내세워 "적화통일 혁명광장의 단두대"를 운운한다. 정작 꽤 중요할 것 같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옹호는 수박 겉핥기성 논의에 그치다 만다. 여전히 'NLL 대화록'을 누가 무슨 이유로 지웠느냐는 논의가 정국의 중심을 차지한다.

제각각 중요하다 생각되는, 혹은 왜 논의되는지 모르겠다 생각되는 문제들이 지나친다. 일종의 '만화경'이다. 그러면서 세상사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지만 '말'이 제각각 정당성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사회에서 분석은 필요가 없다. 한 신문사가 작정하고 혼외자식 추문을 보도하면서 3년 전엔 그러한 추문을 보도할 필요가 없다고 한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신문사의 말의 일관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다. 그저 그 신문사의 말이 힘이 있다는 것뿐이다. 말은 힘이 없는 자들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말에 영향을 받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비교적 좋은 사회일 수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말이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자의 말이 힘이 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글을 쓰는 이의 괴로움은 이 문제가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 혹은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를 구성한다는 데에 있다. 세상사에 대해 말을 하기로 함은 바로 '말이 힘을 얻을 수 없는' 그런 사회를 개선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조건 때문에 그의 말은 힘을 얻을 수 없다. 이는 마치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이 약화되는 원인을 분석할 때 자영업자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을 언급할 수밖에 없지만, 자영업자의 비율이 그렇게 높게 늘어난 이유를 분석하려 든다면 또다시 노동운동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없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상황은 그 각각의 상황을 원인으로 지탱한다. 그것이 어쩌면 사회문제의 총체성일 것이다. 그리고 '무력한 말'은 그 총체성의 복잡한 지형도를 그리면서 그 무력함을 돌파하려고 한다. 말이 힘을 가질 수 없기에 그 이유를 정교하게 묘사하려 한다. 그렇게, 세상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직시하면서 돌파하려 하는 모순적 욕망의 발현이다.

투표든, 사회운동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무엇을 하라'라고 요구하는 일은 쉽다. '말'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것도 쉽다. 어려운 것은 그 요구 자체가 그 요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돌파할 길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이를 합리적으로 돌파할 길은 없으며, 언제나 사회는 이 균형이 어떤 우연적 원인으로 균열을 일으킬 때 새로운 균형을 찾으며 새로운 총체성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사회문제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별로 쓸모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위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괴롭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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