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이 잘 가오"
"금단아…"
14년의 세월을 기다린 10여 분의 짧은 만남이었다. 끌어안고 흐느끼는 부녀 앞에 이념도 정치도 휴전선도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버스에 오르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 신문준씨는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향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0월 9일, 남북으로 헤어져 살던 신금단 부녀가 일본 도쿄 조선회관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된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함남 이원에 살던 신금단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 12월,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나선 아버지가 행방이 끊긴 후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운동을 시작했다. 월등한 기량으로 북한 대표선수가 된 금단은 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에 출전해 육상 400m와 800m에서 연거푸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듬해 열리는 도쿄올림픽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신금단의 신기록 소식은 남쪽에 거주하던 아버지 신문준씨에게도 날아들었다. 신씨는 그토록 보고 싶던 딸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쳐두고 올림픽이 열리는 도쿄를 찾았고 금단을 포함한 북한선수단도 올림픽 처녀 출전의 큰 꿈을 안고 조총련계의 조선회관에 여장을 풀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IOC가 신생국 경기대회를 올림픽 유사대회로 간주해 선수들에게 출전자격 박탈을 결정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북한당국은 이에 반발해 선수단 전원철수를 선언해 버렸다.
실망에 빠져있던 금단에게 관계자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아버지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근처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도쿄를 떠나기에 앞서 마침내 부녀상봉이 이뤄졌다. 12살 어릴 때 헤어진 후 14년만의 만남이었다.
상봉 현장에 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렵게 말문을 연 건 딸이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다 잘 있어요"
"그래, 나도 자유 대한에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이내 울음이 터지고 서로 부둥켜안은 부녀는 귓속말을 나누며 떨어질 줄 몰랐다.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짧았다. 주위에 대기하던 조총련계 청년들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며 금단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바이…"
딸이 내뱉은 한마디는 전 국민의 가슴을 때렸다. 전쟁이 갈라놓은 이산가족의 비극이 절절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뒤 황금심이 부른'눈물의 신금단'이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다.
'꿈인가요 생시인가요/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소'
이후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열기가 일었지만 남북 정권은 이를 외면했다. 반공 태세 유지를 위한 박정희 정권과 정치적 협상카드가 목적인 김일성의 의도 때문이었다.
50년이 지난 오늘도 북한의 속셈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83년, 아버지 신문준씨는 딸과 가족을 그리며 세상을 떴고 북으로 돌아간 신금단은 2000년대 초까지는 육상지도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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