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우리는 그 사물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도 현미경으로 바라보면 또렷하게 잘 보인다. '집중'의 미덕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깨끗해 보이는 손도 현미경으로 바라보면 수많은 병원균이 득실거린다. 어디 그뿐인가. 위험하게 여겨졌던 병균도 확대해 보면 한 폭의 아름다운 추상화로 탈바꿈한다. 이처럼 우리는 집중적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을 더 자세하게,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그렇지만 관찰의 집중에는 부작용이 있다. 우리가 부분에 집착하면 할수록 전체의 모습은 사라진다. 손 위의 주름과 피부조직, 그 위에 서식하는 병균, 그리고 병균의 구체적 모양과 특성이 클로즈업 될수록 우리가 본래 보려고 하였던 손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보면서 그것이 본래 손을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간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분적 특성을 과다하게 관찰하면 결국 전체의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자체를 더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통적인 예술은 부분을 그릴 때에도 항상 전체를 염두에 두었다. 좋은 정물화는, 그것이 어떤 사물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할 때에도, 전체의 분위기를 함께 그린다. 그것이 바로 아우라이다. 나는 이런 접근방식을 '분산'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부분을 그리면서도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드러나게 하는 관찰방식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방식을 '여백의 미'라고 하지 않는가? 물체가 그려져 있는 부분보다는 그려져 있지 않은 빈 공간을 통해 오히려 전체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여백의 기법이다.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포착하려면 주위의 빈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이런 '집중'과 '분산'의 관찰방식을 떠올린 것은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 때문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도 어려운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의 행위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정치적 사건들은 핵심을 파악하기가 여건 어려운 게 아니다. 부분을 보면 이게 옳은 것 같은데, 전체를 보면 저게 맞는 것 같다.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려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사건,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사건, NLL대화록 삭제사건, 국정원 선거개입 댓글사건.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정쟁을, 민생을 위한 '정책 대결'보다는 당파적 이익을 위한 '권력 투쟁'으로 변질시킨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부분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다. 예컨대, 한 거대 언론권력이 검찰총장과 관련된 의혹을 보도하는 순간 검찰의 독립성과 관련된 논의는 검찰총장의 도덕성과 자질에 관한 논의와 한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관음증적 관심으로 변해버렸다. 물론 공직자에게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요구할 것인지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합의 해야 할 사항이지만, 이에 관한 합리적 논의가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판단이 갈린다는 것이다. 공직자는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고, 집권자에게 미운 털이 박혀 찍어내기를 당했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장관이 자신의 소신대로 정책을 펼칠 수 없어 사퇴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맞는 것 같고, 공직자라면 더 신중하게 처신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우리가 양비론 또는 양시론의 덫에 걸려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을 더 잘 보려면 주변을 봐야 한다.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지, 대통령의 통치방식이 과연 민주주의적 소통방식에 부합하는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이럴 땐 그 주변을 보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대통령 주변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대통령에게 충분히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지를 보면 우린 대통령의 통치방식에 관한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부분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분산의 미덕이 요구되는 시절이다.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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