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시작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최종 완성본을 발표한 2006년 직후 인류는 생명공학이 난치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거란 기대에 한껏 부풀었다. 사람이 가진 전체 유전자를 밝혀냈으니 이제 각종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건 시간 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약 7년이 지난 지금, 난치병은 여전히 난치병이다. 환자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신약 개발 소식은 더디기만 하다.
이후 과학자들은 유전자 중에서도 DNA 말고 RNA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각종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단백질 생산에 DNA보다 RNA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유럽 9개 연구기관의 과학자 50여 명이 지난달 일반인 462명의 RNA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영국 과학 학술지 '네이처'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발표했다. RNA 수준에서 유전자의 서열과 기능을 분석한 최대 규모의 연구다.
1%의 함정
과거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내놓은 결과는 사람 한 명이 갖고 있는 유전자 전체(게놈)의 정보다. 게놈의 단위인 유전자(DNA)는 보통 네 종류의 염기(A, T, G, C)라는 물질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이 인체 어느 부위에 어떤 순서로, 얼마나 많이 배열돼 있는지를 모두 밝혀내 공개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과학자들이 필요한 부위의 유전자를 찾아 일일이 크기와 서열 등을 실험으로 알아내야 했다. 그랬던 과학자들에게 DNA '빅 데이터'의 공개는 연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당장이라도 난치병이 극복될 것처럼, 새로운 약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희망을 가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게놈은 과학의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게 디자인돼 있었다. 인체의 각종 생명 활동은 장기와 조직들을 이루는 세포 안에 있는 수많은 단백질이 조절한다. 단백질이 제대로 역할을 하면 건강하고, 기능이 떨어지면 병이 생긴다는 얘기다.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기본 뼈대가 바로 DNA다. DNA 염기 서열이 배열된 규칙에 따라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20가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 과학자들은 인체가 가진 전체 DNA의 약 1%만이 실제로 단백질 생산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머지 99%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필요 없어 보이는 DNA도 있고, 뭔가 다른 역할을 하는 듯한 DNA도 있다. 게놈 모두를 밝혀냈어도 실제 난치병 극복까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짜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콕 집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른 이유
과학자들은 그래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1%에 먼저 주목하기로 했다. 병과 관련된 유전자는 분명 그 안에 있을 테니 말이다. 이 1%의 DNA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염기 서열의 배열 순서나 수, 구조 등이 조금씩 다르다(변이). 이 차이가 노화 속도나 음주 능력, 약에 대한 감수성 같은 수많은 개인차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는 술(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단백질)가 두 가지 있는데, 이를 생산하는 DNA에 어떤 변이가 있느냐에 따라 음주 능력이 달라진다. 효소가 잘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DNA를 가진 사람은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고, 효소가 100%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DNA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마셔도 멀쩡하다. 같은 병에 걸려도 어떤 사람은 약 한두 번 먹으면 씻은 듯 낫고, 어떤 사람은 약을 달고 살아도 도통 차도가 없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한 가지 약이 모든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건 이렇게 보면 당연하다.
DNA 변이가 작을 때 나타나는 이 같은 개인차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진짜 문제는 변이가 심한 경우다. 암이나 난치병, 유전병 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혈액을 굳게 하는 단백질의 유전자에 특정 변이를 가진 사람들은 혈우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처럼 특정 병과 직접 관련이 있는 DNA 변이와 거기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을 조절할 수 있다면 개인별 맞춤 치료도 가능해질 것이다.
RNA 신약 경쟁 더 치열해질 듯
1%의 DNA 염기 서열 정보를 아미노산에 전달해주는 '메신저'가 바로 RNA다. DNA의 변이 정보 역시 RNA를 통해 전달돼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제대로 기능을 못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약은 이런 단백질을 직접 공략했다. 과학자들은 이제 비정상 단백질이 생성되도록 DNA 변이 정보를 전달하는 RNA를 직접 조절하면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본다. 필요한 작용을 하는 RNA를 인위적으로 세포 안으로 넣어서 비정상 단백질을 방해하거나 정상 단백질을 더 만들어내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워낙 불안정해 잘 부서지는 RNA를 세포 안에 넣었다 뺐다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20여 개 연구팀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세포 안팎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생체물질로 RNA를 싸거나 RNA와 결합시켜 세포 안으로 주입하는 기술에 대해 동물 실험과 임상 시험을 하는 중이다. RNA를 세포 안으로 넣어주는 새로운 물질을 최근 개발한 국내 생명공학 기업 바이오니아 박한오 대표는 "다국적 제약사와 함께 진행 중인 RNA 간암 치료제 동물 실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네이처'에 발표된 유럽의 RNA 분석 결과는 이처럼 RNA를 이용한 신약을 개발 중인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빅 데이터'가 될 전망이다. 박 대표는 "462명의 RNA에서 생기는 모든 단백질의 변화를 알 수 있게 됐으니 앞으로 RNA 신약 개발에 한층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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