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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4> 밀양백중놀이의 하용부 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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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4> 밀양백중놀이의 하용부 부녀

입력
2013.10.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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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부터 무동으로 판 따라다녀 1979년 범부춤·북춤 전수생 지정"팔 벌리는 것 만으로 좌중 압도하던 조부의 카리스마 아직 눈에 선해꾼은 만들어지지 않고 타고나는 것… 딸에게도 마음을 먼저 살피라 당부"해외서도 명성… 공연 요청 잇달아

이 시리즈를 구상할 무렵, 좋은 상담자가 돼 주었던 배우 박정자씨는 "피는 못 속인다. 이는 경외스럽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른바 문화적 DNA의 존재를 강력 긍정했던 이 말이 옳다는 것을 하용부씨게서 거듭 확인한다. 10대에 고고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가 지역 놀음판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은 장려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틈틈이 "할배들"에 감사하는 그를 보노라면 '못 속이는 피'가 오롯이 감지된다.

하용부(58)씨. 중요 무형 문화재 제 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 보유자로 공식화 되는 인물이다. 당연히 밀양에 거처를 둔 그를 모셔오지 못 해 서울은 안달이다.

가까이는 9월 12일 LG아트센터에서 펼쳐진'해어화' 무대다. 동래 야류소리의 유금선 등 중견 여성 춤꾼들이 만든 장금도 등 8순의 원로 추모 무대였는데, 그의 신명 나는 북춤을 게스트 무대로 불렀다. 이어진 이번의 상경길은 2~3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듣는 춤 보는 소리, 하용부의 영무(靈舞)'를 위한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긴 하지만 후계자인 딸까지 따라 나섰다.

"밀양백중놀이는 증조부 성옥, 조부 보경 이래 내려온 가문의 자랑이에요."5세부터 무동(舞童)으로 판마다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힌 판의 신명은 곧 존재 이유다. 조부가 밀양 소싸움, 씨름, 놀이판 등을 두루 주관했고, 한판이 끝날 대마다 풍악이 울리며 모두가 노는 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절멸됐다가 1976년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으면서 명맥을 잇게 됐다.

백중놀이란 농사일 한가한 음력 7월 백중, 즉 7월 보름(양력으로 치면 8월 말) 머슴들이 흐벅지게 펼치는 놀음판이다. 모심기, 김매기가 끝나고 벼 이삭이 패기 전은 농사꾼들에게 가장 한가로운 황금 시즌. 그래서 백중을 골라 노는 판은 전국의 공통적 현상이지만 그 중 밀양의 놀음판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하씨는 "큰 고장치고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은 데가 없는데 유일한 예외인 밀양에는 상대적으로 옛 풍속이 잘 보존돼 있는 것"이라 해석했다.

지주들이 머슴들을 놀려 준 때를 잡아, 농민 공동체 두레가 자발적으로 만든 판이다. 말하자면 노(勞)가 솔선하여 사업이 잘 되도록 기원하는 장인 것이다. "할 일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농신(農神)에게 맡기자는 거지요."그 중에서도 보는 이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 병신춤 대목이다. 농민들로부터 병신으로 놀림 받다 쫓겨나는 양반은 범부(凡夫)춤 대목에 이르러 아예 갓을 벗어 던지고 판 속으로 뛰어든다. 일상의 지배관계를 멋들어지게 역전시킨 이들 대목은 당연히 가장 인기 높다. 그가 둘러멘 북과 구성진 목청은 주재자다.

그의 궤적은 불연속적이다. 어려서부터 노는 데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청년이었다. 부산까지 원정 가서 고고장을 휘젓다 입대한 그가 밀양백중놀이에 갔던 것은 운명이었다. 동래야류회 마당이었다. "할배(보경)가 노는 것 보면서 내가 춤을 이어 받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저 춤이 좋았다."

그에게 조부는 "완전 한량"이었다. 사람들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즐기는 놀이판이라면 뛰어 들었다. "춤사위도 춤사위지만 어떤 놀이판이든 금방 후끈 달구는 굉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지요, 과묵하면서도…" 그렇다면 그는 완전 적통이다. 코흘리개 적부터 조부의 춤을 보고 커 오다 무동(舞童)의 영예를 누린 용부는 25세에 전수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1979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범부춤과 북춤으로 밀양백중놀이 전수생으로 지정됐다. 무형문화제 제도에 따라 자연히 제 1기 장학전수생으로 인정 받고 전수조교가됐다. 여나믄 됐던 전수학교 학생수가 그의 노력으로 1990년대 들어서는 방학 시즌에만 200명은 족히 헤아릴 정도였다. 1977년 조부 하보경 작고 후 2002년 문화재, 즉 예능보유자가 된다. 상쇠 박동연, 병신춤 권경도 그리고 북춤의 하용부 등 이 놀음판은 인간문화재 트로이카를 낳았다.

그의 북춤은 이 놀음판 중 즉흥성이 가장 높다. 연희자의 푼수에 따라 얼마든 관객을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다. "관건은 객석과 무대의 공감이죠."

아버지는 농악 때 북춤을 잘 추었다. 지금처럼 양식화된 놀이판이 아니고 동네 행사 때 자연스레 어울리며 만들어 가는. 풍류 넘치던 아버지의 북춤 솜씨가 그에게 이어졌다."꾼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꾼이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팔 한번을 벌려도 놀이판 전체를 압도하고 이내 주목의 대상이 됐던 조부가 그립다. 너댓살 때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다. "전쟁 때 다리가 잘려 의지(義肢)로 갈아 끼운 '고무다리 할배' 등 동네 어른들은 소싸움, 씨름판 끝난 뒤에도 집으로 안가고 모두 우리 할배 주변으로 몰려 들었지요." 할아버지가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은 소년의 의식까지 압도했다.

그의 연기론은 노자의 무위(無爲)론에 닿아 있다. "작위적으로 하려 들지 마라. 신명이 뿜어져 나온다면 관객은 그것을 즐긴다" 그러면서 객석과 철저히 맞물려져 있다.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관객이 즐기면 내 춤도 즐겁다. 무대에 선 사람은 그걸 즐기니까." 그에게, 무대는 더 이상 서양식의 빈 공간이 아니라 객석의 연장이다.

사회에 나가서도 정통의 후예는 낭중지추였다. 한전 사무직으로 사회와 만났지만 그가 직장 가서 한 것은 '오북 놀이' 팀 결성이었다. 모두 15명이었던 이 직장 연희단은'아침마당' 등 방송을 타더니 한전의 대표적 문화팀으로 자리 잡으면서 팀장인 그의 이름을 드높였다. 1986년 부산 동아대 무용과 출강의 길이 그렇게 열렸다. 교재는 그가 지은 '밀양 양반춤과 범부춤'. 조부의 춤을 곰곰 살핀 뒤 일치되는 춤 사위를 뽑아 이론화한 결과물이다. 양반춤의 경우 활개펴기 _ 돋움새 _ 굴신 _ 황산(밀양의 큰 산) 학사위 _ 변형된 두루걸이 자반뒤집기 _ 학사위 등 6가지 판으로 정리된 뒤 공연에 적합한 1시간용으로 거듭났다. "건방진 거지." 혼잣말처럼 그는 뇌까렸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에게 1988년은 서울올림픽에 앞서 연출가 이윤택씨와 조우한 해로 기억된다. 이씨는 부산에 있던 자신의 가마골 소극장으로 하씨의 춤을 끌어들이려 무진 공을 들인 사람이다.

진작부터 하씨의 제자들을 자신의 무대에 세우는 등 백중놀이의 연극성을 흡수하려는 이씨의 노력에 하씨는 마음을 열었다. "미쳤나, 연극과 춤이 무슨 관계고?"라며 코웃음 치던 그가 그 해 겨울 연희단거리패 워크숍에서 배우들에게 춤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던 패기 앞에 아내는 옷 가게를 열어 답했다. 머잖아 가게가 부도나자 그는 한술 더 떠 연희단거리패의 연기 메소드를 개발해 내는 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배우들의 움직임, 음악, 소리의 준거는 밀양 북춤 아니면 양반춤이었다. 신기한 반작용이 일었다. "배우들을 가르치다 보니 내 춤과 사고가 확장되는 거였어요." 그야말로 윈윈 게임.

이름이 알려지며 국내는 물론 해외 공연의 수요가 일었다. 1999년 프랑스 태양극단의 연출자 아리안 뮤니시킴, 2001년 안무가 피나 바우슈 등 기라성들과 작업하며 영감을 주고받았다. 바우슈는 2009년 4월 부퍼탈 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때의 초청길에서 만나 새벽 3시까지 포도주 잔을 기울였다.

그의 독특한 인간관. "나는 눈빛만 봐도 서로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 만들려 세상 살아간다."프랑스 정부 초청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원형 극장 단독 무대도 그 덕에 생긴 일이다. 문화마을 들소리, 노름마치, 바람곶 등 젊은 국악인들과 춤으로 누빈 40여 나라에는 그의 호방한 웃음으로 만든 친구들이 산재한다.

사람 복이 푸지다. 승무 인간 문화재 보유자 이애주씨는 누님으로, 소리꾼 장사익씨는 형님으로 부른다. 이씨는 1984년 운동권 시절 동아리 한사위 학생들과 밀양백중춤을 전수 받으러 왔고, 장씨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1993년에 그의 춤 무대에서 태평소 반주자로 연을 맺었다.

모두를 합쳐도 딸 윤희(31)만 할까. 진주경상대 민속무용과를 나온 딸은 중학교 2학년부터 이 춤을 배우더니 인기를 독차지했다. 아버지가 "춤이란 (본인의 마음에)정말 안 좋으면 못 추는 것"이라 말렸지만 아랑곳 않고 제 길을 가는 딸이다. 그는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감성적인 면이 강하다"며 아직은 영글지 않은 딸의 춤을 끌어 안는다.

하용부씨는 "한국인 특유의 심성과 몸짓을 외국인들은 내게서 발견한 듯 하다"며 해외의 뜨거운 반응을 해석한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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