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지젝거린' 한국당시 인문사회 계열 연구자·비평자 '지젝거리는 앵무새' 양산되기도삶의 결이 분열로 가득차 있다는 것… 알려주는 것이 지젝의 진정한 본령지젝 열풍 추동한 열망은냉전 붕괴 후 좌파 이론 근거 상실… 무턱대고 맞는 이론 설정·추종보다그것에 가려진 세계의 층위 복원해정치적 의미를 찾자는 제안에 열광바디우와 지젝의 연대도 주목철학-정치 사이 사건 문제삼는 바디우… 지젝과 함께 읽히는 것도 중요한 징후마르크스-엥겔스의 연대처럼 21세기의 유령 소환하는 계기 되기를
대학원에 다닐 무렵이니까 1997년 언저리로 기억한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한 동료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철학자 책을 읽자고 제안했다. 라는 책으로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라캉, 히치콕,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쳐 소비에트 체제의 비밀까지 정신없이 종횡무진하며 거침없는 논리를 쏟아내는 이 철학자를 따라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 뒤 유학 시절, 간간이 서울에 들를 때마다 공부하는 지인들과 출판 종사자들로부터 지겹도록 듣게 된 이름이 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임을 알았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도 잘 알지 못하는 후배들도 모두 지젝과 정신분석학 없이는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고 이 기이한 풍경에 놀랄 정도였다. 왜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계는 그토록 지젝에 열광해 왔던 것일까.
물론 지젝이 세계적인 철학자인 것은 맞지만 한국의 지젝 열광은 유독 심하다. 번역 대국 일본에도 지젝의 책은 많이 번역되어 있지만 한국처럼 비평의 언어를 압도적으로 잠식하는 일은 없다.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의 비평이나 정치/문화 평론이 각광을 받기는 하지만 인문사회 계열 연구자의 머리와 입이 지겹도록 '지젝거리지는' 않는다.
2000년대 처음 십 년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낸 탓에 한국에서의 이런 현상은 사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아직도 이 증상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2000년대 십 년 간에 씌어진 같은 또래 비평가들의 문학 평론은 각주부터 훑어보고 지젝의 이름이 발견되면 덮어버렸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젝의 용어와 개념을 차용한 비평이 작품이나 사회문화 현상의 고유성에 주목하여 그 한계 영역을 추적하기보다는, 거꾸로 작품과 현상을 지젝의 이론에 끼워 맞춰 자신의 현학 취미를 뽐내고 지젝 이론의 우수성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지젝을 다룬 논문들 또한 대부분이 분석이 아니라 이론을 변주하는 데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지젝의 이름은 심하게 말하면 수많은 앵무새들을 양산하는 기계 장치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결코 한국의 비평가나 연구자들의 탓만은 아니다. 지젝 특유의 유려한 문장, 매력적인 논리, 그리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모방의 유혹을 느끼게 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대중문화 현상에 주목하여 난해하기로 소문난 독일 관념론과 정신분석학의 여러 통찰들을 '주무르는' 지젝의 필치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비평가와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지젝을 읽는 즐거움이나 유익함을 이런 매력에 국한시키는 한 '지젝거리는 앵무새'의 양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젝의 진정한 본령은 난해한 이론을 일상적인 사회문화 현상에 적용시켜 '섹시한' 분석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고, 거꾸로 일상에서 역사에 이르는 인간 삶의 결이 결코 보편이론이나 규칙으로 포착될 수 없는 분열과 균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젝의 유익함은 그의 이론을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론이란 결코 '써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대저 는 그런 지젝의 본령이 극명하게 드러난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펼쳐지는 지젝의 헤겔 해석은 이제 슬슬 헤겔을 '일반 이론'이란 틀에서 해방시키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헤겔은 철학 분과 안에서도 손꼽히는 난해함을 자랑하는 철학자이다. 지젝도 헤겔이 난해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헤겔의 난해함은 결코 개념과 용어와 논리적 구축 등 이론 차원의 난해함이 아니다. 지젝이 볼 때 헤겔의 난해함은 그의 언어가 실재/환상, 일반/특수, 남/녀, 선/악 등 온갖 이분법의 사이 영역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에 비롯된다. 전산망 상의 숫자로 유통되어 실재인지 환상인지 모르게 되어버린 돈, 선으로도 악으로도 규정짓지 못하는 행위, 끊임없이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구분이 희미해져가는 성(性) 등 헤겔은 일반 규칙의 규정과 구분이 회색지대로 넘어가는 현대 사회의 문턱들(현대 사회의 한계영역)을 문제화했던 최초의 철학자라는 것이 지젝의 해석이다.
지젝의 철학적 입장은 이런 헤겔 해석에서 비롯된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 아니 사유 일반의 과제는 체계의 합리성을 지탱하는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영역을 문제화하는 일이다. 현재의 국가, 정권, 경제 체제가 변혁되어야 한다면 그것을 나쁘다고 규탄하고 타도하기 위해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그 국가, 정권, 경제 체제의 합리성을 지탱하는 비합리적 욕망과 환상은 무엇인가를 탐구하자는 제안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에서 지젝 열풍을 추동한 것은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열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1990년대 후반,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한 차원에서 국민국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이론적 무기의 원천은 고갈 상태에 있었다. 냉전 붕괴 이후 이른바 '좌파' 이론은 현실적 체제 차원에서 기댈 곳을 상실했고, 기존에 무반성적으로 통용되어온 근대의 정치 이념들의 가치와 의미는 폭락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지젝의 이론이 매혹적으로 다가온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턱대고 맞는 이론과 옳은 가치를 설정하고 추종하기보다 맞고/틀림과 옳고/그름이란 사고 틀 자체로 인해 가려진 세계의 층위를 복원하자는 것이 지젝의 제안이었기에 그렇다. 즉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란 이분법으로 인해 '없느니만 못했던(less than nothing)' 삶의 층위를 다양하게 복원하여 정치적 의미를 찾아나가야 한다는 제안에 모두들 무의식적으로 열광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지젝 열풍은 이제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젝 이론의 재기발랄함보다는 그 기본 태도나 관점이 더욱 주목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지젝과 함께 읽히는 것도 중요한 '징후'다. 지젝과 바디우는 서로를 중요한 '동료'로 치켜세우는데, 이는 단순한 전략적 동맹을 넘어선 연대이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를 사사하고 '68혁명' 시기에는 마오이즘에 심취했고 이후 라캉과 함께 작업하며 현대 철학의 심장부에서 경력을 쌓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디우는 강의실과 교실을 오가며 철학과 정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끊임없이 문제화한 인물이다. 알튀세르에서 마오를 거쳐 라캉으로 이르는 바디우의 정치적 사유의 여정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국가'로 향하는 사유와 행위의 진로를 어떻게 비판하고 파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지젝과 바디우의 연대는 이 지점에서 이뤄진다. 현존하는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구성하려는 모든 의지에 딴지를 건다는 의미에서 지젝과 바디우의 사유는 강력한 공명을 이루고 있기에 그렇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지젝과 바디우의 강연과 대화는 둘 사이의 공명이 이 낯선 땅에서도 강력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함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말이 힘찼기 때문은 아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이야기에 유언, 무언으로 응답하려 했던 수많은 참석자들의 열망이 소중했다. 참신하고 체계적인 앎을 열망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없느니만 못한' 개 취급을 받아온 이 땅의 황망한 삶을 어떻게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이었다.
지젝과 바디우에 대한 열광은 그래서 먹물들의 현학 취미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 곳을 부여잡고 드러내려는 언어와 상상력의 산물이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령'의 형상으로 '공산주의'라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모호한 운동을 소환했다. 부디 지젝과 바디우의 공명에 응답하려는 시도가 그 유령을 소환하려는 열망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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