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광주지법 204호 법정(민사12부∙이종광 부장).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양금덕(82)할머니가 68년만에 피해를 증언했다. 양 할머니가 일본에서 끔찍한 착취를 당하고도 임금 한 푼 못 받고 종군 위안부로 오해까지 받은 삶의 굴곡을 또박또박 증언하자 법정에선 눈물과 탄식이 이어졌다.
1944년 5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양 할머니가 다니던 학교의 마사키 교장은 곤도라는 일본 헌병을 데려와 "중·고교도 보내주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며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은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자원자가 없자 마사키 교장은 양 할머니에게 "급장이 손을 들지 않으면 누가 가겠느냐"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양 할머니는 부모 동의 확인에 필요한 아버지 도장을 훔쳐 담임에게 건넸다. "일본에 가면 죽는다"며 반대하는 아버지가 무서워 가족과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뱃길에 오른 13살 소녀는 그의 표현대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아침에 눈 뜨면 온종일 비행기 부품의 녹을 시너나 알코올로 닦고 완성된 비행기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과가 반복됐다. 눈에 페인트가 튀어 불편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돌아오는 건 발길질이었다.
매실장아찌와 단무지 두 조각, 된장국이 전부인 식사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찌꺼기 통을 뒤지다가 얻어맞기도 일쑤였다. 또 밤마다 찾아온 공습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밤이면 '윙윙'하는 환청이 들려 불면에 시달린다고 호소했다.
해방이 돼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일본군 성 노예'라고 손가락질했다. 21살에 결혼한 남편은 10년 뒤 이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가, 밖에서 낳은 세 자녀와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날 재판에는 양 할머니를 비롯해 이동련(83)·박해옥(83)·김성주(84) 할머니와 김중곤(89) 할아버지가 차례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소송을 지원하는 일본인과 고교생들은 방청석 곳곳에서 흐느꼈다.
시민단체 등이 보내준 성원을 잊을 수 없다는 양 할머니는 침묵하는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어린 나이여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 한 번에 돈(임금)을 주겠다'는 말을 믿었는데 어느덧 68년이 지났다"며 "정부가 그동안 한마디 않고 있어 너무 원망스럽다"고 한탄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 때 정부가 우리 대신 돈을 받아 도로도 놓고 공장도 지어서 나라가 발전했다"며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됐으니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1999년 3·1절에 맞춰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기각된 뒤 5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들은 다시 국내에서 각각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11월 1일 선고할 예정이다.
광주=김종구기자 so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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