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상무인 김모씨의 작년 연봉은 2억원을 넘는다. 하지만 그가 낸 세금은 0원. 정상적이라면 최소 5,000만원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비결은 기부금이었다. 그는 2,000만원 가량의 근로소득공제를 제외한 나머지 액수에 대해 특정 단체에 뒷돈을 주고 영수증을 허위 발급받아 기부금을 낸 것으로 신고했다. 기부금이나 의료비의 경우 세법상 특별공제의 한도가 정해지지 않은 점을 악용해 과세를 피한 것이다. 김씨처럼 세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억대 연봉자는 2011년 기준 총 69명이었다.
대형로펌 출신으로 작년 대기업에 입사한 이모씨는 최근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연봉을 50% 더 올려준다는 제안에 이직했지만, 실제 그가 받는 돈은 이전 직장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국세청에 신고하는 공식 연봉의 40% 수준을 이런 저런 수당으로 세금 없이 따로 챙길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이직해 억대 연봉자가 되면서 세금이 연간 123만원 추가로 늘어났다. 이씨는 "월급생활자가 유리지갑이란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로 세원 감소가 현실화되면서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올 1월 현대경제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1%가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있다"라고 응답했을 정도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노령연금 등의 논란을 거치면서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세금이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누리기 위한 일종의 투자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8월 정부가 연간 소득 3,450만원 이상 근로자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 세법개정안을 발표하자 다수 중산층이 분노했고, 결국 정부는 증세범위를 축소해야 했다.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증세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평한 과세체계가 먼저 확립해야 하는데 선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서 증세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률이 가장 높은 계층은 이번 세법개정안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월소득 400만원대(57.3%)와 500만원대(55.6%) 중산층이었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국민들의 분노는 단순히 세금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불공정한 과세로 조세 정의가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로소득을 누리는 자산가나 조세 혜택이 집중된 대기업에 대한 과세 강화 대책은 빠진 채 세금을 걷기 편리한 봉급 생활자에 대한 세금 부담만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조세 정의를 강화하려면 근로소득자와 전문직 자영업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조세 형평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국세청에 따르면 최근 8년간(2005년∼12년) 고소득 자영업자의 소득 적출률은 44%에 달한다. 소득 적출률이란 세무조사를 통해 적발한 탈루액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뜻한다. 이 비율이 44%라는 것은 100만원을 벌면 44만원을 신고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1년 전체 47조2,502억원의 법인세 산출세액 가운데 감면 세액은 9조3,315억원에 달했다. 이 같은 감면 혜택으로 인해 법인세는 수년 간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개인이 부담하는 소득세는 해마다 올라간다.
이전 정부에서 이뤄졌던 부자 감세도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장병완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부자 감세 정책을 시행하면서 2007년 조세부담률이 21.3%였는데 19.3%까지 떨어졌다"며 "깎아줬던 세금을 원상회복 시키는 방식으로 더 거둬들일 수 있는 재원이 매년 60조원 가량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소득층에 대한 세금을 높이는 이른바 '부자 증세'에 대한 논의도 한창이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는 "연소득 3억원 초과에 45%의 최고세율을 적용하고, 1억2,000만원 초과 3억원 이하 구간은 40%의 세율을 부과하면 향후 5년간 15조원 이상의 세수를 추가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모든 국민이 세금을 부담하는 세제개혁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전체 근로소득자의 40%가 면세점 이하로 세금을 전혀 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태일 좋은예산센터소장은 "소득공제로 인해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 면세점 근로자가 많으며 고소득자도 세금 부담능력에 비하면 소득세가 적은 것이 현실"이라며 "조세정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국민적인 공감대를 높인 후 보편적 증세에 나서는 게 조세 저항을 줄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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